우리는 이 세상에 각각의 개별자, 즉 개인으로 존재한다. ‘Individual’이라는 영단어의 의미는 글자 그대로 ‘더 이상 나뉠 수 없다’는 뜻이다. 한 개인은 다른 이들과 구분되는 독특한 완전체라는 말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주의를 기울여 우리 자신과 닿으려 노력할 때 내면 깊은 곳에서 분명하고 진정한 자신만의 목소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자아이고 거기서 세상의 모든 의미와 실행의 동력이 나온다. 결국 이 자아가 경험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세상과 관계를 형성해나가는 것이다.
경험한다는 것은 외부의 자극을 감수(sensing)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험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감지(sense making)하는 것이다. 경험 자체는 철저히 중립적이다. 따라서 데이터화할 수 있다. 하지만 경험에 대한 의미 부여는 주관이 부여된 것으로 데이터화할 수 없다. 우리는 경험한 것을 특정 상황에서 끄집어내 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의사결정을 내리는데 활용한다. 이때 의미 부여 기능이 작동하는데 이 의미 부여는 해석이 관여한 것이어서 중립적이지 않다. 그렇기에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데이터화하기 어렵다. 개개인의 독특함(unique)은 바로 경험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바로 이 대목에서 비로소 도드라진다. 데이터화되기 어렵기 때문에 AI가 원천적으로 범접하기 어려운 우리만의 청정 지역이 바로 여기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이 진행되는 바로 그 지점이다. 그렇다면 우리 고유의 본질적 경쟁력은 바로 이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만의 의미체계를 형성하는 해석 능력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필자는 이 능력을 ‘해석역량’이라 표현한다. 우리 고유의 본질적 경쟁력을 고찰하는데 있어 ‘해석역량’이란 개념이 필요함을 일깨워준 중대한 실험을 살펴보자.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의 ‘대장내시경 체감 연구’다. 지금은 대부분의 환자가 수면내시경을 받지만 이 연구가 진행된 1990년 초만 해도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이 실험에는 총 154명의 환자가 참가했고 실험 시간은 가장 짧게는 4분, 가장 길게는 69분이 걸렸다. 연구에 참가한 환자들에게는 60초마다 그 순간의 고통 정도를 알려주었다. 0은 ‘전혀 고통 없음’을, 10은 ‘고통스러워 참을 수 없음’을 뜻한다. 대장내시경을 받는 동안 환자들이 체감하는 고통은 각기 매우 달랐다. 환자 A는 내시경이 8분 동안 진행된 반면 환자 B는 24분 동안 진행됐다. A, B 두 환자 중 어떤 환자가 더 많은 고통을 받았을까? 대부분은 환자 B가 A보다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B는 A보다 오랫동안 내시경을 받았고, 고통의 영역도 분명 더 컸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대장내시경이 끝나고 모든 참가자에게 내시경을 받는 동안 겪었던 총 고통의 양을 평가하도록 요청했다. 놀랍게도 환자들의 보고 결과는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연구진 역시 B가 총 고통의 양을 더 크게 보고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A가 B보다 더 큰 고통의 양을 보고한 것이다.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을까? 내시경이 끝나기 직전 A는 고통이 7 수준이었는데 B는 고통이 1 수준에 불과했다. 지속 시간은 B가 더 길었지만 총 고통을 평가하는 데 있어 지속 시간보다는 마지막이 어떤 수준으로 종결되었는지가 더 크게 작동한 셈이다. 고통의 가장 정점을 찍으며 종결된 A는 고통의 가장 저점을 찍으며 종결된 B보다 대장내시경의 총 고통을 크게 느낀 것이다.
카너먼은 이 연구를 통해 우리가 경험을 할 때는 순간순간을 인식하는 반면 경험을 해석할 때는 ‘정점-결말 법칙(pick-end rule)’, ‘지속 시간 무시(duration neglect)’를 따르고 있음을 밝혀냈다. 즉, 경험이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경험할 때는 되도록 짧게 지나가기를 바라지만 경험을 평가하고 해석할 때는 고통의 정점과 마지막 순간만 기억해 둘의 평균으로 경험 전체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A와 B의 총 고통의 양은 각각 7.5와 4.5가 된다. A는 B보다 대장내시경에 대해 훨씬 더 나쁜 기억을 품게 되는 것이다. 똑같은 대장내시경을 진행했지만 A에게 그 고통은 B보다 더 컸다. 아마도 A는 이후 대장내시경을 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환자들은 어떤 방법을 선호할까? 짧고 아픈 검사일까, 아니면 길고 조심스러운 검사일까? 앞서 살펴본 대장내시경 체감 연구의 결과에 따르면 이 질문의 답은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경험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면 환자는 아마 짧은 검사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경험을 해석하는 쪽에 초점을 둔다면 길고 조심스러운 검사를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의사들은 경험의 해석에 초점을 맞춰 검사 막바지에 불필요하지만 몇 분간 둔한 통증을 추가한다. 이것이 검사 전체를 덜 고통스러운 것으로 해석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자아는 경험과 경험의 해석을 통해 세상과 지속적으로 대화한다. 경험과 경험의 해석은 긴밀히 얽혀 있다. 우리는 해석할 때 경험을 중요한 원재료로 이용한다. 그리고 해석되고 평가된 의미들은 다시 새로운 것을 경험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금식 기도, 건강검진을 위한 금식, 가난 때문에 배고팠던 경험을 각각 다르게 인식한다. 경험을 해석할 때 배고픔에 부여하는 각기 다른 의미들이 매우 다른 경험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날것의 경험이 아니라 그 경험의 해석과 동일시한다. 감수를 넘어 감지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우리가 ‘나’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순간순간 맞이한 경험들의 물리적 모음이 아니라 결국 우리가 경험에 부여한 의미들이다. 우리는 변화무쌍하고 무질서한 삶의 경험들로부터 우리가 발라낸 의미 체계와 스스로를 동일시한다. 우리의 경험 자체는 철저히 중립적이다. 따라서 모든 경험은 기계가 데이터로 저장하고 이를 통해 우리에 대한 일반적 알고리즘은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각각 날마다 경험한 것을 특정 상황에서 다시 끄집어내어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야 세상에서 벌어지는 낯선 것들을 이해하고 적합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의미가 부여된 경험은 알고리즘을 통해 일반화 할 수 없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창의력(創意力)은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능력’이다. 따라서 창의력은 기술만 연마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술에 의미를 만들고 체계화하며 세련화하는 것이 바로 창의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관장하는 능력이 바로 해석역량이다. 해석역량 수준이 높으면 어렵고 복잡한 상황에서도 이를 해갈해 나갈 수 있는 의미를 찾거나 만들어낼 수 있다. 반면, 해석역량 수준이 낮다면 상황에 일희일비하며 부화뇌동의 의사결정을 하게 될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이 해석역량을 미래환경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우리 고유의 영역이자 본질적 경쟁력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미래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이 더해 갈수록 이 해석역량을 개발하고 부각시켜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