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에 새겨진 겨울 바다 – 삶의 도약을 선언하는 의식

중요한 날이 밝았다. 준비는 전날 밤에 마쳤다. 우리는 정시에 만났고 예정한 시각에 출발했다. 날씨를 제외하면 차질은 없었다. 새벽하늘에서 작은 우박이 떨어지더니 날이 밝으면서 진눈깨비로 바뀌었다. 흩날리는 물방울 알갱이가 차장에 붙여 시야를 가렸다. 와이퍼로 닦았더니 워셔액마저 얼어붙어 시야가 더욱 고약해졌다. 문제 될 것은 전혀 없었다. 앞을 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시야는 조금 흐려졌지만, 마음이 맑고 밝았다.

출발할 때 온도는 영하 4도였다. 태백산맥을 넘어 영동 지방에 들어서니, 마법처럼 날씨가 맑아졌다. 잿빛 세상은 사라졌다. 파란 하늘이 우리를 반겼다. 어느새 태양마저 나타나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양양 나들목에 접어들 무렵엔 기온도 영상으로 올라 있었다. 양양에는 수려하고 깨끗한 해안들이 많다. 파도가 드세어 서핑으로도 유명하다.

두 시간 반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모래사장이 길게 펼쳐진 한적한 해변이다. 식사와 커피를 마시고 오는 사이, 태양은 어느새 드높은 중천까지 솟아 있었다. 우리는 파도가 치는 해안가에 섰다. 내가 미리 선택했던 곳이다. 기준은 두 가지였다. 무엇보다 한적할 것 그리고 의미 있는 지역일 것! 물론 의미 같은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지만, 의미가 없으면 아쉽고 허전하다. 때론 화가 난다. 생각해 보라. 무의미한 시간, 무의미한 공간을!

여행 전, 나는 해수욕장 별로 여름철 피서객 숫자를 비교했다. 지도를 보면서 주변 상가도 검색했다. 선택은 주효했다. 적막했고 아름다운 해안이었다. 여름철엔 해수욕장으로 변신해 피서객을 제법 불렀을 테지만, 한겨울 바닷가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드문드문 두어 명이 오긴 했지만, 겨울 바닷바람에 이내 돌아갔다. 우리와 풍광만 남았다. 청랭한 바람을 타고 해안을 덮쳐대는 파도, 점점이 떠돌며 푸른 하늘을 유영하는 구름, 뭍 가엔 눈으로 해안가엔 모래로 뒤덮인 길고 긴 백사장!

이제 실행만이 남았다. 우리는 한 사람씩 바다에 뛰어들었다. 어떤 이는 발만, 어떤 이는 무릎까지 담궜다. 마지막으로 내 차례였다. 나는 외투를 벗었다. 셔츠와 바지마저 벗자마자 바다로 뛰어들어갔다. 집에서부터 입고 왔던 짧고 검은 핫팬츠를 입고서 머리까지 완전히 바닷속으로 입수했다. 바다 밖에서 볼 때는 거친 파도가 조금 두렵기도 했는데, 파도 속으로 뛰어든 바다의 내부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잠깐이나마 잠영을 하려 했지만, 이내 물 밖으로 나왔다.

숨을 참고 있기가 힘들었다. 잠시 얼굴을 내어 호흡을 가다듬다가 다시 입수했다. 조금이라도 버티기 위해 숫자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열까지 헤아리며 숨과 추위를 참아내고 싶었지만, 이내 바다 밖으로 머리를 내었다. 역시나 숨이 문제였다. 바다에 뛰어든 순간부터 온몸이 차가워서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던 게 원인이었다. 나도 모르게 바닷물에서 빠져나와 해변을 달렸다. 차오르는 숨도 문제지만, 더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겠더라.

몸을 담그는 의식, 침례(浸禮)는 그렇게 순식간에 끝났다. 침례는 기독교에서 행하는 의식이다. 종교적 색채가 강하지만, 이 특별한 의식에 깃든 함의는 종교의 본질뿐만 아니라 삶과 변화의 정수를 일깨운다. 그 일깨움에 다가서기 위해 잠시 침례의 형식과 의미를 들여다본다.

침례(浸禮)를 한자어 뜻대로 풀이하면, 물속에 잠기는 의식이다. 영어의 baptism을 세례 또는 침례로 옮겼다. (baptism은 그리스어에서 왔는데, 원어도 물에 잠긴다는 뜻이다.) 세례는 씻을 세(洗), 침례는 잠길 침(寖) 자를 쓴다. 세례는 머리에 물을 세 번 끼얹음으로 진행되고, 침례는 몸을 전부 담갔다가 나온다. 세례라고 옮긴 교단은 죄를 씻는다는 개념에, 침례라고 옮긴 교단에서는 뭍으로 올라올 때의 새로운 삶에 방점을 둔다. 강조점이 다를 뿐 거듭남이라는 의례의 상징은 같다.

세례는 자신의 옛 자아(습관, 믿음, 가치)가 죽고 거듭난 자아가 신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시작되었음을 선언하는 의식이다. 요컨대 옛 자아의 죽음, 새로운 자아의 탄생, 신과의 연합을 의미한다. 세례의 세 가지 의미는 삶의 도약과 변화의 본질을 상기시킨다. 한 번도 이루지 못한 비전을 실현하고 싶다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삶을 살아내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아간다면 지금까지 얻었던 것들만 얻게 될 것이다.

비전에 걸맞은 모습으로 일상을 재편해야 한다. 어떻게? 1) 타성에 젖은 습관을 내던지고, 2) 삶의 양식을 새롭게 구축하여 3) 새로운 여정은 신과 함께 나아갈 것! (혹시 ‘신’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이 든다면 신념, 이상, 가치관, 태도, 습관 등으로 바꿔 불러도 좋다.) 신을 믿는 과정에서도, 삶을 혁신하는 과정에서도 세례는 가치 있는 의식이다. 믿음을 갖도록 돕고, 변화를 추동하도록 이끈다. 무림의 고수를 찾아가면 3년 동안 물동이를 지는데, 인내의 과정일 뿐만 아니라 옛 삶과 결별하고 새 삶으로 진입하는 상징이기도 할 것이다.

의식은 오래전부터 인간 정신의 성장을 도왔다. 고대문화의 성인식은 아이들에게 책임감과 공동체 의식을 심어 주었다. 조지프 캠벨이 전한 호주 원주민 사회에서, 부족의 남자들은 성인식의 주인공이 된 소년을 풀숲 뒤로 격리한다. 그 날밤, 숲 건너편에서 여러 가지 의식이 거행된다. 소년이 몰래 구경하면 신체적인 형벌을 받는다. (실제로 죽이기도 하는데, 우리에겐 충격적으로 들리지만, 그들에겐 비행 소년을 막는 하나의 길이란다.)

얼마 후에는 소년에게 의식을 목격할 시간이 주어지는데, 캥거루 분장을 한 성인과 개 분장을 한 성인이 소년에게 공격적으로 덤벼든다. 공포감 형성은 공연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이러한 의식의 목적은 소년의 가슴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미지 대신 부족의 조상 이미지를 새기는 것이다. 아이는 의식을 치르기 전의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몸도 마음도 달라진다. 부모에게 의존하던 존재에서 공동체의 책임감 있는 존재로 거듭난다.

의식(ritual)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자신의 신화를 찾아 나선 이에겐 특히 중요하다. 신화라고 해서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캠벨의 표현을 빌자면 “여러분의 꿈을 글로 적어 보라.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신화다.” 지금 당장 진실한 신화 하나를 가져라. 신화를 품는 적기는 없다. 오늘부터 꿈을 적으면 그만이다. 자기를 전율시키는 신화를 가진 사람은 다른 이들을 전율시키는 인생을 산다. 정확하게는 ‘신화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신화를 이룬 사람’이 그렇다.

의식의 가치는 신화를 이루기 위함이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신화를 품었다면, 지금까지의 삶과 결별하고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해야 하니까! 성스러운 의식은 결별과 창조를 돕는다. 이번 양양 여행도 결별과 창조를 추동할 의식을 거행하기 위함이었다. 의식을 함께 했던 벗들도 개와 캥거루 복장보다는 바다 여행을 좋아했을 것이다. 내 안의 깊은 내면과 저 높은 하늘로부터 추동력을 얻고 싶었는데, 원하는 바를 적시에 얻었다. 희열을 느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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