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잘 입는 사람’이란? (1) 나를 입는 사람, 치유를 경험하는 사람

몇 년 전, 서점에서 낯선 풍경을 목격했다. 베스트셀러 2위가 컬러링 북이라니. 책을 들어 넘겨 보아도 그것의 힐링 포인트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한 권을 샀다. 핸드백 밑그림이 있는 페이지에서 시작해보기로 했다. 단색 가방을 칠할 때는 데생 기법을, 노란색 퀼팅 백을 칠할 때는 인상파 화풍을 흉내 내 보았다. 한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컬러링 북에 항복했다. 원하던 결과가 나오지 않자, 나머지를 채울 의욕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모든 이에게 컬러링이 힐링은 아닌 것 같았다.

어떤 이들에게 쇼핑몰은 성지와 같다. 나에게도 그랬다. ‘쇼핑은 곧 힐링’ 이라는 이 등식이 어느 정도 공유되어 있는 건 맞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그런 건 아니다. 2000년대 중반, 케이블 채널에서 <What not to wear>라는 방송을 즐겨 봤다. 진행자는 영국의 스타일리스트 트리니와 수잔나였다. 사연을 통해 두 명을 선정하고, 그들의 변신을 돕는 것이 방송의 내용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내면의 문제를 풀지 못한 채 옷 뒤에 숨으려 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할까봐 양갈래 머리와 미니스커트 차림을 고수하던 30대 여성,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 과장된 가발을 쓰고 짙은 화장을 하던 40대 주부, 자신은 이미 끝났다며 할머니처럼 입던 40대 연구원…

진행자들은 맨 먼저 출연자들이 자기 몸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360도 거울의 방에 들어간 출연자들은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럼 진행자들은 그들의 몸이 별로 끔찍하지 않음을 일깨워준다. “허리가 이렇게 잘록한 거 알고 계셨어요?” “아름다운 종아리의 소유자군요!”

다음으로 진행자들은 하루 동안 출연자의 일상을 체험한다. 그들이 누구와 살고, 집에서 무얼 하며, 어떤 교통수단으로 출근하고, 직장에선 누구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된다. 가족과 동료들이 출연자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도 듣는다. 출연자들은 스스로의 생각보다 더 나은 사람임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과장되거나 억제된 옷을 입고 있었던 거다.

한편 진행자들이 병행하는 작업이 있다. 옷장 뒤엎기. 출연자들의 옷장에는 맞지 않는 속옷, 이상한 가발, 체형에 어울리지 않거나 투머치인 옷이 잔뜩 들어 있다. 대부분의 옷은 쓰레기봉투로 향한다. 집을 비웠다 귀가한 출연자들은 자기 옷을 함부로 버린 두 사람을 향해 분통을 터뜨린다.

이후 본격적인 스타일링 수업이 이어진다. 체형과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옷을 고르는 법을 배운 출연자들은 혼자 쇼핑하는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대부분은 앞서 들은 조언을 가볍게 무시한 채, 옷장 속에 차고 넘치던 괴상한 옷을 쥐고 계산대로 향한다. 물론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이 사려던 옷은 압수당하고 새로운 옷을 건네 받는다. 그럼 출연자들은 온 힘을 다해 저항한다. 새 옷이 자신에겐 과하다며 한사코 거절하기도 하고, 자신이 루저라며 피팅룸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도 한다.

결국 완벽하게 변신 성공한 그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눈물을 글썽인다.

이후, 일상으로 돌아간 출연자들의 영상이 소개된다.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출연자들은 행복해 보였다. 그들은 새 스타일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있음은 물론, 한층 건강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내가 보았던 변신 프로그램 중 <What not to wear>는 베스트였다. 진정한 ‘치유’를 선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패션의 힐링 포인트는 어디에 있는 걸까. 혹시 힌트를 얻을까 하는 기대로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예술이 우리를 어떻게 치유하는가’에 대한 통찰로부터 패션의 힐링 포인트를 이해하긴 쉽지 않았다. 내가 <What not to wear> 출연자들 만큼이나 패션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점, 또 컬러링 북에서 피로만 경험한 점은 어떻게 봐야 하는 걸까.

돌아보면 우린 예술품을 감상하는 데서 그칠 때가 많다. 컬렉팅 기회가 많지 않아서다. 우린 그저 작가가 작품에 투사한 정신세계와 아름다움에만 관심을 가지면 된다. 맘에 드는 작품 앞에 조금 오래 서 있다 돌아서며 ‘아 힐링 돼!’ 이 정도에서 치유를 경험했다고 해도 별 문제는 없다. 예술에서는.

그러나 옷에서의 치유는 간단치 않다. 우리는 옷을 보고, 사서 모은 후, 조합해 입어야 한다. 옷은 우리가 ‘감상자’에 머무를 수 없는 대상이다. ‘감상자’는 물론, 소장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컬렉터’도 되어야 하고, 소장한 작품을 조합하여 창작하는 ‘작가’까지 되어야 한다.

무엇이 아름다운지, 무엇을 사야할지, 무엇과 무엇을 조합할지, 어떻게 입어야 아름다운지 판단하는 과정. 이건 노동이다. 우리 대부분에게 패션이 고통이 되어 버리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내가 컬러링 북에서 피로만 느낀 것과 <What not to wear> 출연자들이 울어버린 것. 그건 힐링에 도달하기까지 필요한 훈련을 감당하기 벅차서 였다. 패션으로 힐링하려면 역량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What not to wear>의 출연자들이 ‘치유’를 경험한 건 단지 옷을 더 잘 입어서가 아니었다.

패션이 ‘보다’의 대상이 아니라 ‘입다’의 대상이 된다면, 패션은 내 일부가 된다. 우리는 ‘사다’와 ‘입다’ 이전에 ‘나는 누구인가’를 외면할 수 없다. 트리니와 수잔나는 출연자들이 누구인지 알아냈다. 그 정체성이 옷으로 표현 되었기에 얼굴에서 빛이 난 거다. ‘치유’의 비밀은 나를 입는 것에 있었다. 옷 잘 입는 사람이란 나를 입는 사람, 그래서 치유를 경험하는 사람이다.

옷 잘 입는 사람 되기. 이를 위해 내가 거쳐본 과정은 다섯 단계이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알기. 둘째, 멋진 옷과 매치를 알아보는 감상자 되기. 셋째, 나다운 옷 제대로 사는 컬렉터 되기. 넷째, 멋지게 조합하여 나를 표현하는 작가 되기. 다섯 째, 진정한 나로 살아가기. 자기 옷을 입고 살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된다. <What not to wear>의 마지막 영상에서 내가 본 건 5 단계에 도달한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이었다.

5 단계에 도달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나를 믿고 견디는 그런 시간 말이다. 그럼 누구든 옷 입기에서 행복을 경험할 거라 믿는다. 운동도 기본기를 다지기 까지가 힘들다. 그 시기만 지나면 몸과 마음에서 얻는 치유는 온전히 나 자신의 것이다.

한 권의 컬러링 북에는 꽤 많은 페이지가 있다. 한 장 한 장 칠할 때마다 실력이 좋아지고, 결국  즐길 기회가 주어지는 것. 컬러링 북의 힐링 포인트는 나아지는 자신을 만나는 과정에 있는 게 아닐까. 포기만 하지 않았다면, 뒤로 갈수록 예뻐지는 컬러링 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다.

옷 잘 입는 사람 되기. ‘천천히’가 필요했다. 남보다 더 잘 입으려 조급해 하기보단 가만가만히 나를 타일러 보자. 어제보다 매의 눈을 갖게 된 감상자, 어제보다 내 옷을 잘 고르는 컬렉터, 어제보다 재치 있게 나를 표현하는 작가가 되어보자고. 지금 별로면 뭐 어때. 나이 들수록 더 멋진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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