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잘 입는 사람’이란?(2) 소통을 청유하는 사람

 

음악과 경쟁

 

“선배, 요즘 주말에 가수들 나와서 하는 경연 프로그램 보세요?”

몇 해 전 후배가 내게 건넨 질문이다. 아니라고 답하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아니, 그걸 안 보신다구요? 폭발적인 가창력이 얼마나 짜릿한데요.”

관객을 ‘압도’하는 무대를 보여주는 게 방송의 취지에는 맞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압도’의 음악은 불편함을 남겼다. 그 방송은 어딘지 모르게 기인열전의 가수 버전 같았다.

“나는 너무 노래 잘하는 가수 안 좋아해.”

“엥? 그럼 선배는 어떤 가수를 좋아하세요?”

나는 브라질 음악, 그중에서도 보사노바를 좋아한다. 내가 보사노바에 입문할 때 제일 먼저 빠져든 목소리의 주인공은 조앙 질베르토다. 난 그가 보사노바의 거장인 것도 몰랐다. 

‘굵직한 목소리도 아닌데, 게다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포르투갈어인데. 어쩜 이리 섹시할까.’

그의 목소리가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기타 반주에 엇박자 가사가 묘하게 어우러져서 였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그의 음악의 느슨함 이면에는 치밀한 계산이 있었다. 그는 몇 날 며칠 집구석 욕실에 앉아 기타를 쳤다. 파란 욕실 타일 벽을 튕겨져 나오는 현의 울림을 가만히 느끼며 밀리미터 단위로 계산해 가며 붙인 가사. 그는 자기 음악에서 완벽을 추구했다.

그가 큰 무대에서 설 때면 기타 한 대로 홀연히 무대를 채웠다. 열창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모든 관객은 그의 한 음 한 음에 집중하며 그와 호흡했다. 2003년 일본 콘서트에서 조앙은 관객과 하나가 되는 경험에 취해 20분간 명상 상태에 잠겨버렸다. 

“조앙 질베르토의 음악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유토피아적인 힘이 있다.” 

어느 평론가의 말이 그 무대에서 증명된 셈이다. 조앙 질베르토는 듣는 이를 ‘압도’하려 하지 않았다. 느슨한 연주로 감상자와 하나가 되고 진심으로 소통하려 했다. 

이런 내 생각과는 별개로, 대중음악은 자꾸만 요란해진다. 폭발적인 가창력, 강한 비트, 과감한 메이크업, 이슈가 될 법한 퍼포먼스, 화려한 의상, 중독성 있는 후렴구. 이제 음악은 1분 안에 우리를 홀려야 한다. 음악은 경쟁의 대상이 되었다. 들려주고 음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하고 감탄해야 하는 그 무엇. 그래서일까. 음악으로 이루어지는 소통의 깊이와 폭은 축소되어 버리는 듯하다.

 

옷 입기와 경쟁

 

일상에서도 나는 유사한 경쟁을 본다. 특히 옷 입기에서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SNS 속 패션 피플의 옷차림이 기인열전의 패피 버전처럼 보인다. 더 많은 ‘좋아요’를 받고 더 많은 팔로워를 얻기 위해, 더 세고 더 튀는 것으로 시선을 압도하려 애쓰는 것 같아서.

비싼 브랜드 제품으로 나를 ‘압도’하는 패션에서 우리는 ‘졌다’는 감정을 느끼고 나도 모르게 사진 속 그들의 우월한 표정을 동경한다. 제로섬 게임 같은 삶을 사는 우리가 옷차림 역시 경쟁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Photo by Clem Onojeghuo on Unsplash

‘옷 잘 입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나는 꽤 오랫동안 누군가를 ‘압도’ 하기 위해 옷을 입어왔다. 내게 ‘패셔너블함 = 요란함’이었고, 나를 향한 순간적인 시선을 즐겼다. 그러나 그런 옷 입기는 두 번 입고 못 입을 옷, 더 센 옷을 사야 한다는 강박만 남겼다.

몇 년이 지나, 그때의 옷들을 옷장에서 쫓아냈다. 그 옷들을 잠시 다시 꺼내었을 때 나를 향했던 시선이 떠올랐다. 돌아보니 사람들은 나를 신기해할 뿐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또 나는 나를 바라보던 누구와도 진실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나는 외로웠다. 

 

음악과 소통

 

‘압도’로 다가오는 음악을 떠올려 본다. 그런 음악은 깊은 감동을 주지도, 여운이 오래가지도 않는다. ‘내가 이렇게 잘할 줄 몰랐지?’라고 묻는 음악은 두 번 듣는 순간 경외감이 시들해 버리기 마련이니.

반면 내가 자꾸만 꺼내서 듣는 음악은 듣는 이에게 ‘소통’을 청유하는 음악이다. ‘나는 이런 걸 느낀다. 당신이 나와 같은 걸 느낀다면, 난 이 감성을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 애써 잘 부르려 하지 않는 보사노바의 느슨함에 내가 끌리는 건 이런 이유인가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조앙의 음반 <Amoroso>를 틀어본다. 소박한 편곡, 잘 부르지 않은 노래. 그의 음악을 자꾸만 듣고 싶은 이유는 듣는 이에게 음미할 여지를 허용하기 때문이며, 자기만의 음악 세계를 위트 있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은 ‘소통’을 청유한다.

그의 음악처럼 나도 자꾸만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듣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많은 사람이다. 어쩌면 그런 사람이 ‘말 잘하는 사람’이 아닐까.

‘말 잘하는 사람’이란, 현란한 지식으로 ‘날 봐. 나 똑똑하지?’를 유창하게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은 두 번은 만나고 싶지 않다. 나에게 ‘말 잘하는 사람’이란, 어색하지 않은 침묵으로 듣는 이에게 생각할 여지를 허용하는 사람이며, 경험과 방황을 거친 자기 세계를 위트 있게 풀어낼 줄 아는 사람이다.

 

옷 입기와 소통

 

나의 옷 입기는 무엇이 문제였을까. 매일 옷을 입으며 우리는 자신을 표현한다. 자기표현의 궁극적 목적은 만나는 사람들과의 소통이 아닐까. 그럼 ‘옷 잘 입는 사람’이란, 옷으로 표현된 그 사람의 세계가 궁금하고, 나도 내 세계를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다.

과거의 난 옷 입기에서 소통의 맥락까지 고려하지 못했다. 현란한 디테일이 가득한 옷 입기를 반복했던 난 현란한 화술로 유창함을 뽐내는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늘 ‘옷 잘 입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옷 잘 입는 사람’이 아니었다.

 

Photo by Brooke Cagle on Unsplash

이제 내게 ‘옷 잘 입는 사람’이란, 화이트 셔츠 소매 살짝 걷은 흐트러짐으로 보는 이가 다가올 여백을 허용하는 사람이며, 실수와 방황을 거쳐 얻은 자기만의 위트를 맥락에 맞게 입을 줄 아는 사람이다. ‘옷 잘 입는 사람’이란 소통을 아는 사람이다.

자극적인 무엇으로 ‘날 봐’라고 자랑하는 순간 벌어지는 우월함의 시선과 감탄의 시선 교환. 그 소통의 울림은 피상적이며 일회적이다. 반면 현란한 화술을 자랑하지도 않고 화려한 옷차림으로 압도하지도 않지만, 경험과 방황을 거친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생각과 감성의 소통. 그 소통의 울림은 깊고 지속적이다.

누군가를 압도해서 한 발 물러나도록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있는 그 순간의 기류를 음미하게 하는 사람. 치밀하게 계산해서 입었어도 보는 이를 긴장시키지 않는 사람.

옷으로 소통을 청유하는 사람. 그 사람이 내겐 ‘옷 잘 입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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