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잘 입는 사람’이란? (3) 편견을 입지 않는 사람

“선생님, 다음 주 쇼핑 약속 취소하고 싶습니다.”

A님의 상담은 3주나 진행된 상태였다. 혹시나 상담 중 내가 말실수라도 했던가. 상담 중에 내가 했던 말과 A님의 표정을 떠올리느라 몇 분을 바삐 보냈을 때, A님의 메시지가 다시 왔다.

“선생님 때문이 아니라… 저 때문이에요. 예전에 친구들이랑 파리에 여행 갔을 때, 겨우 롱샴 백 하나 사왔어요. 그 정도로 제가 쇼핑을 못 해요. 이번에도 그럴 것 같아서요.”

자칭 ‘옷 못 입는 사람’들의 셀프 진단은 다양하다. 모자란 패션 감각, 특이한 체형, 이상한 취향, 너무 많은 나이, 여자 형제의 부재…  그러나 이 모든 이유를 다 듣고 나서도 난 그분의 변신을 낙관한다. ‘옷 잘 입는 사람’이 되는 걸 방해하는 건 그런 것들이 아니니까.

소설가 김영하는 인물을 창조할 때 인물의 ‘프로그램’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 고심한다고 한다. ‘프로그램’은 ‘인물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일종의 신념’이다. 작가만 알 뿐 인물은 자신을 지배하는 그 ‘프로그램’의 존재를 모른다. 인물과 인물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는 것도 인물이 파멸에 이르는 것도 인물에게 내재된 ‘프로그램’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의 변신을 낙관할 수 없을 땐 바로 누군가의 강한 프로그램을 목격했을 때이다. 프로그램은 다양한 ‘편견’으로 드러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입을 수 없다’는 편견, ‘옷 입기는 배울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는 편견, ‘가족들에게 좋은 소리 못 들으면 아무 소용없다’는 편견, ‘교양 있는 사람은 옷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편견…  나는 그날 A님의 메시지에서 A님이 평생 입어 왔을 견고한 프로그램이자 편견을 보았다. 

‘옷 잘 입는 사람은 편견을 입지 않는다’

다양한 누군가의 변신 과정을 도와 온 나의 결론이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옷 잘 입는 사람이 된 분들은 실패가 두려워 ‘편견’ 속에 숨지 않는 분들이었다. 자신의 프로그램을 인지하고 깰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옷 잘 입는 사람’이 된다.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가 ‘프로그램’을 인지하는 순간, 날아오던 총알을 떨어뜨리고 하늘을 날아다닌 것처럼. 

 

이 글에서는우리가 깨야할 패션 편견 10 가지를 소개한다. 

 

1. 옷을 잘 입으려면 옷이 많아야 한다.

20년 넘게 옷장을 관리해 본 결과 큰 옷장이 필요하지 않았다. 손 가는 옷은 한정되어 있다. 또 기본 아이템 중심으로 산다면 적은 옷으로도 많은 조합이 가능하다. 레고를 쌓을 때 기본이 되는 블록은 성도 되고, 차도 되고, 배도 되듯이, 기본 아이템이 많으면 꾸안꾸룩도 가능하고 적당히 힘준 룩도 가능하다. 물론 조화로운 조합은 쉽지 않다. 그래서 과거의 난 완성도 높은 한 벌의 옷만 샀다. 옷장에 옷은 많아지고 조합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제한됐으며, 같은 방식으로만 입어야 했기에 재미가 없었다. 특별한 레고 블럭은 쓸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다. 내가 숱하게 사왔던 화려한 프린트 원피스와 디테일 가득한 아우터는 그런 아이템이었다.

 

2. 한 철 신고 버릴 신발, 비싼 건 필요없다.

2년 전 컨설팅 때 어느 고객에게 들었던 말이다. 신발은 어디까지나 내 체중을 견뎌주는 아이템이다. 너무 가격이 낮으면 발은 물론 온 몸이 아프다. 진짜 멋쟁이들은 옷에서 힘 빼고 신발에서 힘준다. 스타일리시하고 편하기까지 한 신발로 힘을 주자. 마주보고 이야기할 땐 평범한 토털룩이어도, 헤어지는 순간 ‘앗!’하며 훔쳐보고 싶은 토털룩이 완성된다. 옷 입는 즐거움은 옷에서만 얻어지는 게 아니다.

 

3. 전신 거울은 없어도 된다.

옷을 잘 입는 사람은 옷 한 점이 아니라 토털룩을 입는다. 비싸고 튀는 옷 하나가 아니라 저렴한 옷으로라도 조화로운 토털룩을 입은 사람이 진정한 패션 고수이다. 외출 전 토털룩을 점검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게 바로 전신거울이다. 매일 거울에 비춰보며 생각하며 입는 재미에 맛들이면 옷을 덜 사도 즐겁다.

 

4. 좋아하는 디테일이 포함된 옷을 모으면 맘에 드는 옷장이 된다.

나를 찾아오시는 분들께 내드리는 과제가 있다. 옷장의 옷을 꺼내어 착장컷을 찍어보는 작업이다. “제가 좋아하는 디테일이 들어간 아이템만 샀는데 모았더니 투머치가 되네요.” 토털룩은 팥빙수 만들기와 같다. 뽀얀 우유 얼음에 달지 않은 팥이 올라가야 함은 물론 고명엔 절제가 필요하다. 좋아하는 초코와 젤리를 고명으로 다 올리면 정체불명의 팥빙수가 되는 법. 좋아하는 디테일이 있는 옷을 제대로 입고 싶다면 나머지는 심심한 아이템으로 선택하자. 고급스런 팥빙수 같은 토털룩이 완성되려면, 절제가 필요하다.

 

5.  2년 동안 안 입는 옷, 언젠간 입을 것이다.

옷장에는 좋아하는 옷만 남기자. 모두 100% 맘에 드는 옷이어야 한다. 2년 이상 입지 않았다면 어딘가 맘에 들지 않아 방치한 옷이다. 좋아하는 음식만 들어있는 깔끔한 냉장고처럼 좋아하는 옷으로만 채워진 옷장. 의생활이 한결 행복해질 것이다. 

 

6. 옷은 ‘따라’ 입는 것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따라 입으려는 욕구 이면엔 두려움이 있다. 내가 고르고, 내가 매치하면 틀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나도 꽤 오래 누군가를 ‘따라’ 입었다. 그러나 ‘따라’ 산 옷은 몇 년 후 거의 다 버렸다. 틀리지는 않았지만 원하는 옷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옷을 버리지 않기로 마음먹은 후 나는 잡지 속 옷을 따라 입지 않기로 했다. 대신 잡지 속 스타일리스트의 두뇌 활동을 따라 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입어 보니, 입는 재미가 쏠쏠했다. 입는 재미는 사는 재미보다 크고, ‘만들어’ 입는 재미는 ‘따라’ 입는 재미보다 크다. 옷을 따라 입기보단, 옷 잘 입는 사람의 뇌를 따라 입자.

 

7. 패션으로 힐링은 쇼핑이 정답

카드를 긁고 쇼핑백을 받아 드는 순간은 짜릿하다. 그 순간 쇼핑은 힐링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산 옷이 얼마 안 가 방치되고, 방치된 옷으로 옷장이 터질 것 같다면, 쇼핑은 힐링이 아니라 고통이 된다. 진정한 힐링은 내 옷장을 열고, 내 삶에서 옷장 속 옷이 생명력을 얻었을 때 얻는 것이다. 옷장 속 옷을 활용하는 법을 아는 사람, 입는 재미를 아는 사람, 자신의 옷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은 쇼핑 없이 힐링을 경험한다. 진짜 멋쟁이는 옷장에 옷이 별로 없다.

 

8. 옷을 많이 사고 버리다 보면 패션 지능이 높아진다.

역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문제집 많이 산 애가 다 공부 잘하는 건 아니니까. 문제집 많이 사서 많이 풀면서 해야할 가장 중요한 작업은 내가 뭘 모르고 뭘 아는지를 알아내는 것, 메타인지를 높이는 일이다. 옷을 많이 사고 많이 버리기를 반복하기만 하면 얻는 게 없다. 많이 사고 많이 버리는 가운데, 패션 메타인지를 높이는 성찰이 필요하다. 나의 소비 패턴과 평소 옷 입는 패턴이 어떻게 다른 지부터 파악하자. 사는 옷과 손 가는 옷이 다르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부터 패션 메타인지는 높아진다.

 

9. 옷 입기는 감각이다. 

과거의 나를 포함한 많은 분들의 편견이다. 심지어 난 내가 패션 감각이 타고난 ‘선택받은 사람’인 줄 알았다. 화려한 옷을 입는 게 내 감각을 뽐내는 방법이라 믿었다. 과거 내 사진을 보면, 웃기려고 입은 것 같은 투머치 룩 사진이 많다. 그때의 옷들은 어느 날부터 방치되었다. 몇 년이 지나, 곰팡이가 핀 옷을 몇 보따리나 의류 수거함으로 보내던 날 알았다.

 ‘난 옷 잘 입는 사람이 아니라, 옷 잘 입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던 거구나.’

그때부터 만원도 버리지 않기 위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패션에 대한 열정으로 스크랩해둔 잡지를 다시 훑어보았고, 전문가들이 ‘베스트 드레서’를 택할 때 말하던 기준을 적어 보았다. 전문가들의 뇌를 관찰하기 위한  나름의 몸부림이었다. 그러자 반복되는 패턴이 보였다. 옷 잘 입기 위한 ‘법칙’이 보였다.

  • ‘반대의 법칙’ – 상반되는 것들로 매치했을 때 밸런스가 맞아서 토털룩이 조화롭다
  • ‘빼기 더하기의 법칙’ – 디테일 뺀 옷에 가방/신발/액세서리로 디테일을 더한다
  • ‘색상 조화의 법칙’- 조화로운 배색을 1 아이템 1 컬러로 입으면 활용도가 높다
  • ‘여백미의 법칙’ – 토털룩에 화이트 아이템이나 흐트러짐이 있을 때 더 멋지다

법칙을 발견한 후, 생각해서 옷을 입는다는 게  즐거웠고,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아도 멋진 토털룩을 입을 수 있어 좋았다. 요즘 말로 ‘꾸안꾸’가 가능해진 것이다.

왜 공부하거나 일할 때는 이성을 풀가동했으면서, 옷 입을 땐 이성을 멈췄던 걸까? 난 옷 입기를 감각이라고만 생각했던 거다. 물론 타고 감각도 무시할 순 없다. 그러나 배우고 공부해서 잘 입을 수 있다는 건 몰랐다.  맛을 아는 혀는 요리를 완성하지 않는다. 맛있는 음식을 하고 싶다면, 요리법을 알아야 한다. 패션 감각 좀 타고나지 않으면 어떤가. 옷 잘 입기 위해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좋다. 옷 입기에 이성을 동원해보자.

 

10. 내 외모와 비슷한 옷을 입으면 잘 어울릴 것이다.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 자연스럽게 반대의 맛을 찾는다. 도넛과 커피, 낙지볶음과 콩나물 국, 피자와 오이 피클. 반대의 맛으로 맛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반대의 법칙’이다. 옷 입을 때도 마찬가지다. 반대 분위기의 패션 아이템을 함께 매치하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같은 분위기로 걸쳤을 때보다 멋지다. 헐렁한 와이드 팬츠엔 슬림 핏 재킷을 입고, 하늘하늘 쉬폰 원피스엔 카디건과 하이힐 대신 밀리터리 재킷과 스니커즈를 매치하는 것이다. 출근할 때 수트에 스니커즈를 신는 사람이 많아진 건 ‘반대의 법칙’을 알아챈 사람들이 많아져서일지도 모른다. 

외모와 옷의 조화도 마찬가지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 패션의 완성은 몸매라는 말이 있는 이유는 토털룩에서 옷과 얼굴, 옷과 몸의 조화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귀여운 외모라고 꼭 귀여운 옷을 입으란 법은 없다. 오히려 귀여운 외모에 보이시한 아이템을 걸치면 묘하게 멋스럽다. 호피무늬 재킷 입을 때 메이크업까지 무서우면 센 언니가 된다. 센 언니가 아니라 호피 재킷 입은 멋진 언니가 되고 싶다면, 메이크업은 거의 생략하고 헤어도 자연스럽게 연출하면 좋다. 포멀한 수트를 입고 출근해야 한다면 헤어라도 자연스럽게 연출해 보자. 

덧. 외모와 유사한 옷을 입지 말고, 내면과 유사한 옷을 입는 게 오래오래 즐거운 옷 입기의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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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글과 같은 주제로 강연한 두 영상입니다. ‘옷 잘 입는 사람’으로 출근하시고 싶은 독자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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