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잘 입는 사람이란?'(5) 제대로 따라 입는 사람

 

나는 패션을 공부한 적도 없고 업계에서 커리어를 쌓은 적도 없다. 그저 옷을 좀 많이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다. 어쩌다 보니 그런 내가 남의 패션 스타일링을 돕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옷 입는 감각을 타고나지 않았다. 20대 시절 사진 속 내 모습은 패션 흑역사 그 자체였으니까.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고 싶을 때가 많았는데 그 대부분의 이유가 너무 과한 옷차림이 부끄러워서였다. 오랫동안 쇼핑에서 숱한 실수를 경험했다. 나는 그럴수록 옷 잘 입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2004년. 케이블 TV를 보게 된 이후 내 TV는 패션 채널에 고정되어 있었다. 런웨이 패션의 화려함에 넋을 잃기도 하고 패션 전문가들이 나와 워스트와 베스트 드레서를 뽑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처음엔 옷을 보는 게 좋았는데 나중엔 전문가들의 이야기가 더 재밌었다. 그러나 내 눈엔 예쁘게만 보이는 여배우가 워스트 드레서가 되는 이유와 수수하게 입은 여배우가 베스트 드레서가 되는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행사장이나 남의 결혼식장에 나타난 연예인이 너무 애쓴 듯한 옷차림이면, 영락없이 그는 워스트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워스트 드레스가 된, 예쁘지만 왠지 촌스러운 여배우의 옷차림에서 내가 보였다. 출근할 땐 잘 입었다 생각했다가도 이상하게 화장실 거울 앞에만 서면 빨리 집에 가고 싶었던 건 나도 예쁜 옷만 입고도 촌스러운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내겐 내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조화를 보는 안목이 없었다. 그냥 예쁜 옷만 다 걸치면 멋쟁이가 되는 줄만 알았다. 꾸민 듯 안 꾸민 듯 왠지 모르게 세련되어 보이는, 꾸안꾸 룩은 남의 일이었다.

몇 년 간 나는 다양한 채널에서 패션 전문가들의 이야기에 경청했다. 그들의 베스트드레서 심사(?) 기준엔 이런 것들이 있었다. 

‘여성스러운 드레스를 입을 땐 헤어 메이크업을 거칠게 표현할 것. 그래야 촌스럽지 않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을 땐 스니커즈나 워커. 밀리터리 재킷까지 걸치면 금상첨화.’

‘촤르르 떨어지는 블랙 슬랙스와 심플한 실크 블라우스를 비율에 맞게 잘 입으면 원피스보다 세련된 하객룩이 완성된다.’

‘화려한 백을 들 땐 옷을 최대한 심플하게 화이트 셔츠 원피스 정도로만 매치할 것’ 

‘화려한 액세서리를 착용할 땐 메이크업을 최대한 수수하게 할 것’

‘날씬함을 과시하려 쫙 다 붙게 입는 것보다 어느 하나는 헐렁하게 힘 빼야 세련된 룩이 된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고 나니, 행사장의 연예인을 보면 베스트 드레서를 맞힐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난 패션 전문가의 말에서 더 배울 게 없었다. 나는 전문가의 스타일링 팁을 거의 다 익혀 버렸던 거다. 

그 이후론 패션 방송이 재미가 없었다. 그러나 잡지는 여전히 흥미로웠다. 잡지 속 스타일링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범 답안을 눈에 익힐 수 있어서다. 혼자 들른 카페에서 하이엔드 매거진이라도 만나게 되면, 잡고 앉아서 넘겼다. 스마트폰이 생긴 이후엔 해외 인터넷 쇼핑몰의 토털룩을 감상했다. 파페치, 샵밥, 네타포르테, 매치스패션. 블랙 프라이데이 때 저렴하게 쇼핑하려고 방문하기 시작한 곳인데, 웬걸 어느 순간부터 여기서 패션을 배우게 되었다.  이 사이트들은 마네킹에 물건 하나 달랑 입혀 놓고 찍은 사진이 아니라, 그 아이템을 포함한 토털룩을 입은 모델의 사진을 볼 수 있도록 해 두었다. 심지어 모델이 빙그르르 도는 영상을 제공하기도 한다.

인지 과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창의성이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니다. 창의성이란 자신이 이미 아는 지식 중에서 새로운 상황에 필요한 해결책을 끄집어내는 능력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퀸스 갬빗>에서 확인할 수 있듯 체스 챔피언들의 의사결정은 즉흥적이지 않다. 그들은 수많은 체스판을 머릿속에 암기하고 있다가 기억 속에 존재하는 체스판이 눈앞에 펼쳐질 경우, 머릿속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것을 응용해서 체스를 두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많을수록, 즉 우리 각자의 머릿속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해 둔 데이터가 많을수록 문제 해결 상황에서 꺼낼 수 있는 해결책의 수는 다양해진다. 

내가 패션 TV 시청을 중단한 이후로도 패션잡지와 외국 인터넷 쇼핑몰에서 토털룩 감상을 계속했던 건 머릿속 데이터베이스를 풍부하게 하고 싶어서였다. 물론 해외 인터넷 쇼핑몰에는 말도 못하게 비싸고 화려한 물건들이 대부분이다. ‘어 괜찮은데?’ 하고 가격을 확인하면 보통 월급쟁이의 한 달 치 월급으로 감당 안 되는 숫자가 우리를 반긴다. 또 절대 일상에서 불가능한 투머치 패션이 우리를 반기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런 사진을 보고 잇 아이템, 브랜드, 트렌드에 시선을 뺏긴다. 나 역시 그랬는데 사진 속 물건에만 집중했을 때 내게 남은 건 과소비와 후회였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런 사진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못 살 건데 구경은 왜 해?’ 

지금 내가 패션 잡지와 해외 인터넷 쇼핑몰에 눈여겨보는 대상은 뚜렷이 보이는 대상이 아니다.  스타일리스트의 두뇌활동이다. 고급스러운 배색, 핏과 길이의 조화, 서로 다른 소재 간의 절묘한 어울림. 스타일리스트는 우리가 어차피 못 살 물건을 매치하여 토털룩을 만든다. 토털룩엔 물건으로 표현된 전문가의 두뇌활동이 있다. 

사실 진짜 멋쟁이들은 디테일이 많은 요란한 옷을 입지 않는다. 많이 보고, 눈으로 익힌 다음, 머릿속 데이터베이스에 입력된 데이터를 상황에 맞게 다르게 변형해서 꺼내어 쓸 줄 아는 사고를 패션에 적용해서 옷을 입는 사람. 

그 사람은 따라쟁이이지만 창의적이다. 물론 나는 창의적인 따라쟁이가 아니었다. 그냥 따라쟁이였다. 많은 옷을 버린 끝에 쇼핑몰 사장님 따라 쟁이는 졸업하기로 했다. 그러나 내가 따라 입기를 완전히 졸업한 건 아니다. 난 사진 속 전문가의 두뇌 활동을 흉내내려 한다. 따라 입기에서 발상전환을 해본 셈이다. 그러자 예쁜 옷만 다 걸치면 되는 줄 알았던 내가 화이트 티셔츠와 화이트 스니커즈의 심플한 매력에 눈을 떴고, 예쁜 옷 다 입고도 왠지 모르게 촌스러웠던 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전문가의 두뇌활동을 많이 보고 많이 외워두면, 그건 결국 창의적 발상의 밑거름이 된다. 옷 입기도 마찬가지인 거다.  열심히 보고 배울 수록, 나의 라이프스타일과 그날의 TPO에 맞게 스타일리스의 두뇌활동을 따라 입게 된다.

창의적인 따라쟁이가 되려면, 전문가의 두뇌활동의 결과물을 반복해서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모바일 환경에서 본 사진이라면 스마트폰에 저장해 두고, 잡지에서 본 사진이라면 마음에 드는 컷을 스크랩해두자. 그렇게 자주 보며 기억하고 배우다 보면, 누구나  저렴한 브랜드에서 알짜 아이템만 뽑아 사는 고수가 될 수 있다.

전문가의 두뇌활동을 모방할 줄 아는 사람. 타고나는 감각에만 의존하지 않고 학습의 결과 갈고 닦은 이성도 활용할 줄 아는 사람. 전문가의 두뇌 활동을 제대로 따라 입는 사람. 그 사람이 옷 잘 입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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