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는 왜 좋아하는 것이 없어?”
한창 개인사업으로 바쁠 때, 전 여자친구이자 현 아내가 필자에게 했던 질문입니다.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즐기는 영화, 드라마도 거의 안 보고, 유튜브도 안 보고, 그렇다고 딱히 다른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주변 지인들 사는 이야기에도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죠. 사실 그 당시 제 머리 속에는 온통 일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살 수 있을까, 내 노력이 부족한 건 아닐까, 어떤 새로운 강의 아이디어가 있을까, 이번 달이 집필하던 원고 마감일인데 어떻게 하지 등등 아침에 눈을 뜨고 잠이 드는 순간까지도 일 생각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스스로를 일중독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고요? 저는 밤늦게까지 일해 본 적이 별로 없었거든요.
‘사실 저는 일중독자가 맞습니다.’
한국인들은 일을 많이 합니다. (비)자발적 야근도 많이 하고, 근무시간보다 30분, 1시간 일찍 나오길 주저하지 않죠. 우리나라 근로시간이 세계 1, 2위를 다툰다더라, 하는 OECD 통계는 아마 여러분 누구나 한번 쯤은 접해보셨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일을 많이 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다수의 한국인들이 자신을 일중독자로 인정하길 주저한다는 점입니다. 왜 그럴까요? 답은 일중독자에 관한 우리들의 고정관념에 있습니다.
일중독자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일중독자의 모습을 한번 떠올려 봅시다. 우선 일중독자들은 겉모습부터 티가 납니다. 언제 빨았는지 모르게 낡고 구겨진 옷, 잘 안 씻은 것 같은 꾀죄죄함, 피곤에 찌들어 있는 얼굴이 떠오릅니다. 일중독자들에게 ‘칼퇴’는 절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단어입니다. 마치 망부석이라도 된 듯 자리에 앉아 아침이고 낮이고 밤이고 일어날 줄을 모릅니다. 야근은 일상이며 심한 경우 집에 들어가는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아 보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일중독자에 관한 매우 전형적인 고정관념을 갖고 있습니다. 까마득한 업무량, 자발적으로 매일 반복하는 야근 등과 같은 것 말입니다. 이런 엄격한 고정관념에 비춰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은 아직 일중독자까지는 아니다, 라고 판단하는 것이죠.
하지만 일중독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물론 일중독자들이 다른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근무 시간이 더 긴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이 생각하는 일중독의 핵심은 바로 강박적인 사고입니다. 만약 칼퇴근을 한다고 해도 퇴근하는 도중, 그리고 집에서 계속 일 생각을 하고 있다면 절대적인 근무 시간은 많지 않아도 충분히 일중독자로 분류될 수 있죠. 심리학자들이 일중독 성향을 측정하기 위해 활용하는 심리 척도 문항들을 보면 일중독의 개념이 우리가 알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중독자들의 특징>
‘나는 평소에 일을 많이 한다.’
‘나는 야근을 자주 하는 편이다.’
‘나는 일을 좋아한다.’
<심리학자가 생각하는 일중독자들의 특징>
‘나를 일하도록 밀어붙이는 내적인 압박감을 느낀다.’
‘일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는 것이 어렵다.’
‘여가 시간에도 일에 대해 생각한다.’
‘일을 하지 않는 날은 왠지 불안하다.’
혹자는 일중독이 나쁜 것이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노는 것보다는 그럴 시간에 더 일해서 회사에서 더 인정받고, 승진도 빨리 하고, 돈도 더 많이 벌면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이죠. 충분히 일리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수의 심리학 연구들은 일중독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높은 정서불안, 낮은 자존감, 일-가정 갈등, 직무 탈진, 삶의 만족도 저하, 높은 스트레스, 낮은 직무 만족도 등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밝혀냈습니다.
그러면 일중독자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것들을 다 감수하고서라도 일에서의 성취가 높아야 덜 억울할 겁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심리학자들은 일중독 성향이 업무 성과에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설명합니다. 때때로 성과를 증진시킬 수 있지만 과도한 스트레스, 창의성의 감소, 과도한 피로감으로 인한 생산성 저하, 대인관계의 어려움 등을 겪을 수 있고 장기적으로 조직의 성과를 저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일중독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대개의 일중독자들은 진심으로 자신의 일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보다는 왠지 더 해야 할 것 같아서,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을 견딜 수 없어서 차라리 일을 더 하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만약 이런 압박감을 경험하고 있다면, 무작정 일을 줄이려 노력하기보다는 그 압박감이 무엇에 의한 것인지를 성찰하려는 노력들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사회적인 기대, 불안정한 업무 환경, 높은 경쟁 부담 등이 여러분의 일중독을 부추기고 있을지 모릅니다.

심리학자들은 직무열의work engagement라는, 더 건강하게 일을 즐기는 사람들의 특성을 설명합니다. 일을 더 하려 한다는 점에서 일중독과 직무열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심리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두 개념은 서로 독립적이며,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도 다릅니다. 일중독은 앞서 살펴보았듯 여러 부정적인 결과를 낳지만 직무열의는 반대로 삶의 만족감, 행복, 성취감 등 여러 긍정적인 결과와 연결됩니다.
그럼 일중독과 다른 직무열의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심리학자들은 직무열의를 이루는 요소로 1) 활력, 2) 헌신, 3) 몰입감을 강조합니다. 풀어 설명하자면 직무열의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열정을 느낄 만큼 일이 재미있어야 합니다. 일에 대한 의미와 자부심이 명확해야 하고, 짧더라도 ‘굵게’ 빠져들 수 있어야 합니다. 강박적인 태도에 의해 일로 내몰리는 일중독자들과 달리 직무열의가 높은 사람들은 스스로 고민하고, 움직이고, 선택한다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