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나뭇가지 앞에서 – 나는 왜 인문학을 공부하는가 (1/3)

그녀는 슬쩍 꽃잎을 만졌다. 엄지와 검지로 예쁜 잎을 가볍게 비볐다. 우린 대형서점 안 꽃가게를 지나던 터였고 그녀의 거침없는 접촉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다른 날 어느 카페에서도 그녀는 테이블 위 화병에 꽂힌 초록 잎사귀를 쓰윽 붙잡았다 놓았다. 두 번 모두 생화인지 조화인지 확인하려는 의도였다. 비슷한 경험을 거듭하고 나니, 식물을 다소 무성의하게 대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막연한 칭찬보다 의미 있는 조언이 좋아요. 평소 그녀가 하던 말이었다. 자신의 삶과 언행이 더 나아지길 바라며 모 대학에서 마음공부까지 하던 터였기에, 나는 불편한 내 감정을 진솔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만지지 않고서도 생화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길이 있을 거예요. 줄기와 잎사귀를 주의 깊게 관찰하면 뭔가 보일 때가 많아요. 물속에 잠긴 뿌리에서 실마리가 잡힐지도 모르죠. 조화는 어딘가 다를 테니까요.” 말하는 동안, 나의 시선은 꽃을 향해 있었다. “세심하게 들여다볼수록 이 녀석에 대한 애틋함이 생겨나고 생화를 구별하는 감각이 키워지겠죠. 슬쩍 만지는 행동보다 품위도 있을 테고요.”

품위는 우리 대화의 단골 주제였다. 그녀는 고상하고 품위 있게 행동하길 바랐다. 언젠가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그녀는 교양, 우아, 품위 등 뉘앙스가 비슷한 어휘 중 품위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사람이 갖춰야 할 기품’이라는 품위의 뜻을 알려주었더니 그녀는 자신이 바라던 것이라며 만족스러워했다. 그 이후, 품위는 종종 등장하는 화두였다. 두 사람에게 품위란, ‘있어 보이기’ 위한 처세가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운을 뜻하는 말이었다. 식물을 대하는 태도를 성찰하다 보면 행동이 달라질 테고, 예전과 다른 행동에서 풍기는 분위기를 표현하려고 선택한 단어가 ‘품위’였다. 이 단어에 깃든 맥락을 그녀도 잘 알았다.

조화라면 꽃에 해 될 게 없고, 생화라도 큰 문제는 아니다. 이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나도 공감했다. 먹고 사는 일과는 무관하고, 그날의 대화에서 중요한 비중도 아니었다. 식물을 대하는 태도에 관해 대화하다가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품위 없고 무식한 처사일 것이다. 다행하게도 그날의 대화는 유익했다. 내 생각은 저리로, 그녀 생각은 이리로 왔다. 소통은 원활했고 분위기도 좋았다. 잎사귀를 만지는 모습이 누군가에게 무신경해 보일 가능성에 대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내 머릿속엔 고귀한 목표, 영화 <신세계>, 종교와 같은 생각들이 떠다녔지만, 시간과 자리가 여의치 않아 얘기를 꺼내지 않고 헤어졌다.

의식주 문제와 닥친 현안을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바쁘고 때때로 벅찬데, 식물을 대하는 태도를 돌아보자고?! 그렇다, 내가 하려는 말이 정확히 그 얘기다. 이유는? 세상에는 식물을 대하는 방식마저 성찰하면서 더 나은 태도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교훈과 생각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잎사귀를 만지던 그 날, 머릿속으로 영화 <신세계>가 스쳐갔다. 영화에서 강 과장(최민식 분)은 상사의 사무실 소파에 앉아 옆에 놓인 난을 만지작거렸다. 급기야 날아든 상사의 경고. “아, 그 이파리 자꾸 손으로 만지지 말라니깐!” 날카로운 말투였다. 금지된 것의 유혹 때문일까. 강 과장은 멈추지 못했다. 결국, 난잎 하나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상사는 아직 보지 못했다. 꺾어진 난잎이 보이지 않도록 강 과장은 화분을 스르르 돌려놓았다. 그 노심초사에 웃음이 터졌던 장면이다.

식물을 함부로 만지면 안 될까? 꽤 골치 아픈 물음이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양하고, 추구하는 가치와 기준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자각도 저마다 다르다. 반려동물을 키운 경험이 있다면 동물의 존재에 대해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주제에 집중하고 논의의 범위를 좁히기 위해 질문을 바꿔야겠다. 식물을 함부로 만지면 어떻게 될까? 문제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첫째, 식물의 주인에게 제지당할 수 있다. 친구가 키우는 식물에 손상을 준다면 친구의 열분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둘째, 언젠가는 벌금을 물거나 처벌받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도 반려동물 문화가 많이 바뀌었다. 이제는 동물을 학대하면 처벌을 받는다. 최근 한 연예인이 반려견을 자주 파양한다는 의혹을 받았다. 능력 이상으로 많은 동물을 키우는 무책임한 행위를 뜻하는 애니멀 호딩(animal hoarding)은 아직은 처벌 사례가 없지만, 처벌 기준이 마련되긴 했다. 동물보호와 관련된 법은 예전에는 없던 제도이자 문화다. 미래의 어느 날, 이런 기사를 만날 수도 있을까? “30대 남성 구속, 장기간 방치로 10여 종 식물 죽음에 이르러”

셋째, 우리 내면의 한구석이 시들거나 죽을 수도 있다. 그 한구석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그것은 생명과 교감하는 감각이자 대지의 숨결과 연결되는 통로다. 식물을 정성스레 대하는 이유는 식물의 주인이 있어서가 아니다. 법의 제지 때문도 아니다. 식물 자체의 존엄성 때문이다. 어느 책에서 이런 격언을 보았다. “살아 있는 것들에게 폭력을 쓰지 말라. 살아 있는 것들을 괴롭히지 말라.” 식물은 살아 있는 존재다. 움직이지 못할 뿐 생명체라는 점에선 동물과 매한가지다. <범죄와의 전쟁>에 나온 명대사 “솨라 있네”는 식물과 주고받기에 마땅한 말이다. 생명을 소중히 대하면, 자연스레 그 교감의 기운을 서로 나눈다. 생명을 함부로 대할 때는 알지 못했던 영감, 기쁨, 기운을 경험하는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이 글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는 노력이나 법을 준수하는 일은 최소한의 도덕이지 아름다운 세상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감히 제안하건대, 인문학을 공부한다면 홀로 있을 때도 준법 그 이상의 삶을 살아가자고 말하고 싶다. 원만하고 화목한 해결이 요원해질 때 하는 말이 “법대로 합시다”가 아닌가. 법은 높은 기준이 아니다. 인문학의 세계를 거닐고 싶다면, 좀 더 고귀한 가치를 찾아보자. 식물을 괴롭히지 말라! 이 말은 어떤가? 생각할수록 성스럽고 고귀한 금언이다. 산행하다가 무심결에 식물을 붙잡기 일쑤고, 반려동물 문화는 성큼 진보했지만 식물을 둘러싼 문화는 사정이 다르기에 하는 말이다.

식물이 생명체임을 기억하며 괴롭히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든든하고 기쁘다. 그들은 저 ‘성스럽고 고귀한’ 금언을 소중히 따를 것이다. 지난해 어느 봄날이었다. 매일 오르던 집 뒷산에 올랐다. 등산로가 없는 데다가, 오르려면 집 마당을 거쳐야 해서 다른 사람이 오르는 일은 거의 없다. 나도 반려견 산책이 아니었다면 오르지 않았을 산이다. 그 날은 뜻밖에도 누군가가 산에 다녀갔음이 분명했다. 매일 지나치면서 만나는 나뭇가지가 부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산행 초입에 선 나무였다. 가지 하나가 내가 다니는 길로 뻗어 있어서 매번 몸을 낮춰 통과하던 나의 길동무였다. 그 가지를 누군가가 손으로 잡아당긴 것으로 보였다. 부러진 나뭇가지 앞에서 한참 머물렀다. 녀석의 생채기를 연신 바라보면서.

성스럽고 고귀하다는 말을 한 단어로 표현할 순 없을까? 내가 찾은 단어는 ‘거룩’이다. 잠시 종교적인 분위기를 걷어내고 본연의 뜻에 집중해 보자. 거룩은 개신교에서 자주 쓰는 말이지만,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도 사용하던 단어다. 16세기 조선, 아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치기 위해 간행된 책 『신증유합』에는 ‘거룩’의 근대국어 형태인 ‘거륵’이 등장한다. 책에는 이렇게 쓰였다. “거륵 위(偉).” 거룩에 해당하는 한자로, 더없이 훌륭하고 위대하다는 뜻의 위(偉)를 설명한 것이다.

얼마만큼 훌륭해야 거룩함(偉)에 이르는지 궁금해진다. 누가 봐도 한눈에 ‘구별’될 수 있을 정도의 경지라면, 거룩하다고 해도 좋을 성 싶다. 구별됨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거룩함과 상통하는 말이기도 하다. 구약 성서에서 거룩함을 뜻하는 말은 카도쉬(Kadosh, קדוש)인데 ‘휘장’에서 유래한 단어라고 한다(백석대 김진섭 교수). 휘장을 치고 나면 공간이 안팎으로 나눠진다. 휘장이 성막이 되어 거룩한 장소, 성소를 만드는 것이다. 참된 신앙인은 성소에서 속된 행위를 하지 않는다.

인문학도(人文學徒) 역시 구별된 삶을 꿈꾼다.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배워가면서 공부하지 않던 때와는 다른 삶이 펼쳐진다. 인문정신의 휘장을 쳤다면,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성스러운 선언이 아니다. 일상적이고 소소한 실제의 이야기다. 거룩한 일은 따로 있지 않다. 거룩한 태도와 의식이 있을 뿐이다. 작은 일이라도 정성스럽게 대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거룩이다. 모두가 이익을 좇을 때 의로움이 무엇인지 묻고, 모두가 발전에 눈이 멀 때 진정한 진보를 모색하는 삶 또한 거룩이다. 어지러운 세상일수록 도도히 구별됨은 얼마나 귀한 일인가!

거룩함을 아는 삶, 다시 말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고 더 나은 배려를 인식하는 것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첫 번째 이유다. 구별됨을 위해 현학적인 말을 하거나 심오한 지식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아름답고 선한 것에 대한 자각과 용기야말로 중요하다. 2016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미셸 오바마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어휘로 구별됨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전달했다. 트럼프의 선거전이 한층 좀스러워질 때였다. 미셸은 달랐다.
“When they go low, we go high.”
(그들이 비열하게 굴더라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갑시다.)

거룩을 경험하려면 어떡해야 할까? 종교 경전을 펼치는 일도 의미 있는 시도다. 위대한 경전이라면 성과 속을 나누지 않을 것이다. 영적인 것을 경험할수록 세속의 미물도 얕보지 않는 법이다. 앞서 인용한 ‘생명을 괴롭히지 말라’는 금언도 불교 경전 『숫타니파타』에서 취한 말이다(소설 제목으로도 회자 되었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경구가 나오는 경전이다). 나에게 종교 경전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교리가 아니라 따르고 싶은 지혜다. 그래서 매혹적이다. 식물을 괴롭히지 말라는 가르침은 일상적이고 소소하다. 그렇기에 더 절실하다. 그 소소한 것들이야말로 거룩이 싹트고 피어나는 명당이겠다. 삶과 일상을 좀먹는 악귀는 소소한 것들에 상주할 테니. 별 것 아니야, 라고 속삭이면서.

인문정신의 휘장을 펼쳐
이전의 내 삶과도 다르게
여느 사람들과도
다르게 살자는 마음으로,
오늘 작은 화분을 하나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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