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두레박을 준비했는가 – 때때로 시를 읽게 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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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별안간 몸을 일으켰다. ‘지금 당장 운동을 해야겠어!’ 화들짝 깨어난 정신으로 폼롤러 위에 몸을 펼쳤다. 맨손으로 바닥을 짚고 할 수 있는 횟수까지 푸시업을 했다. 몸이 찌뿌둥해서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채근도 없었다. 몸의 중요성을 상기했기 때문이었다.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몸이 곧 나’다. 행복은 마음에 달린 동시에 몸의 상태에도 속하는 문제다. 7, 8년 전에 깨쳤던 이러한 자각을, 독서가 소환했다. 자각이 신체적 게으름을 흔들어 깨웠다. 번개처럼 번쩍이는 독서였다. 읽던 책은 운동에 관한 실용서가 아니었다. 시집이었다. 시어들이 하늘로 치솟더니 마음에 천둥 같은 울림을 만들어냈다. 이병률의 시 <좋은 풍경>의 몇 구절이 빚어낸 내면의 전율이었다. 일부를 옮겨 본다.

“혁명을 하기에 좋은 몸인가요
걸식의 허둥지둥하는 몸인가요”

나는 후자였다(습관적으로 ‘나의 몸은 후자였다’라고 쓸 뻔했다). 혁명에 어울리는 단단함과 날램을 찾기 힘든 몸이다. 삶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우유부단했고 달려갈 푯대 없이 갈팡질팡했다. 혁명하기에 좋은 몸이란, 대체 어떤 상태인 걸까? 이런 물음을 안은 채로 그날 이후 날마다 운동했다. 하루 이틀 거른 날은 있지만, 3일 이상 잊은 적은 없다. 건강한 육체만으로도 능히 혁명에 성공할 수 있다는 듯이 부지런히 운동했다. 십 년은 달고 살았을 어깨 결림부터 내던지고 싶었다. 이것은 부드러운 어깨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보다 근원적이고 중요한 문제였다. 몸과 마음은 하나니까. 혁명하기에 좋은 몸은 혁명하기에 좋은 마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이 머리를 경쾌하게 자극했다. 시 읽기와 푸시업! 이 생경한 두 행위의 결합은 그렇게 이뤄졌다. 시의 힘으로! 시적 언어가 몸의 가치를 상기시켰고, 의식화된 자각이 운동으로 이끌었다.

시란 것이 이리도 강렬하니 우리 모두 시집을 읽자, 고 말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시 읽기의 힘겨움을 되짚어보련다. 올해 나의 첫 독서는 시집이었다. 지난 연말, 한 젊은 시인이 집으로 보내 준 선물이었다. 적절한 시절 인연으로 시집을 읽은 건 아니었다. 이태 전에도 한 해의 첫 책으로 시집을 펼쳤으니까. 돌이켜보면 무언가를 시작하는 즈음이면 나는 시집을 손에 들곤 했다. 왜 시집일까? 일종의 의식이었다. 시인의 감각이나 통찰을 배우고픈 마음도 있긴 했지만, 그보다는 한 해의 시작을 음미하는 의례에 가까웠다. 나는 의식으로 삼는 독서에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지만,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나의 시집 읽기에 대한 아쉬움을 직시하는 중이다.

시집을 읽고 나면, 성취감과 불만족을 동시에 느끼곤 했다. 비록 얇기는 해도 책 한 권을 읽었다는 뿌듯함 vs 이해하지 못한 시가 수두룩하게 남았다는 찜찜함! 이러한 양가감정에 직면했다. 시를 쓴 이와 삶의 경험이 다르고 감수성도 다르니, 모든 시를 이해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어딘가에서 다음과 같은 시 읽기의 팁을 제안하기도 했었다. 시집을 어떻게 읽을까? 한 줄 한 줄, 주의 기울여 읽되 감이 오지 않는 시는 죄다 넘어갈 것. 느낌이 오는 시나 마음이 화답하는 시 또는 영감을 안기는 시와는 손을 잡고 춤을 출 것. 시와 춤을 춘다는 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면 그 의미를 알기 전까지는 시를 멀리할 것(지금 하는 일과 함께하는 사람에게 시간을 듬뿍 주면서), 그래도 책을 읽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찜찜함이 따라다닌다면 훌륭한 산문집이나 논픽션을 읽을 것!

시집 독해의 어려움은 심드렁하게 넘기는 책장이 많다는 사실이다. 나만의 고민은 아니리라. 몇 권의 시집을 낸 장정일은 시 읽기의 무상함을 지적했다. 그의 진의가 시에 내재한 결함을 뜻하는지, 시를 대하는 태도를 문제 삼는지는 드러나지 않지만, 시 독해를 둘러싼 우리네 모습을 생각하도록 이끄는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시집)으로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거나 친구를 기다릴 때 혹은 통유리로 둘러싸인 패스트푸드점에서 나르시시즘에 빠지기 위해 사용한다. 시집이란 그 분량과 크기에 의해서도 그렇지만 연작시나 장시를 빼고 나면 편편이 독립된 까닭에 여가의 선호물이 되었다. 문제는 시집의 크기와 두께가 여가를 선용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시의 단편적인 성격이 논리와 사고를 짜투리로 재단한다는 것이다. 눈 밝은 독자야 시집 전체를 하나의 구조물로 파악하는 장고(長考)를 할 수도 있고 한 줄의 시구에서 우주의 드라마를 읽고 삶의 비의를 깨닫기도 하겠지만, 많은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저 한 권의 시집을 읽었다는 지적 허영과 교양인의 대열에 끼어 면피나 했다는 포만감만 남을 뿐이다.”

장정일은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일갈을 날린 후, 시집을 읽어도 좋은 사람들을 세 부류로 한정했다. 현역 시인, 그들의 연구자들 그리고 앞으로 시를 쓰려는 사람들! 이들뿐이다. 그 외의 사람들은 시를 읽을 필요가 없다고 못 박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젊은 사람들이 시집을 읽는 것을 불길하게” 여겼다. 장정일은 소설가다. 한때는 시인이었고, 문학사에 올릴 법한 소설도 쓴 문인이다. 문학과 시의 힘을 모르지 않을 그가 왜 시 읽기를 말리는 걸까? 문학이나 교양은 혼자서는 인생을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생살이에는 문학도 필요하지만, 빵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젊은이에게 시를 읽기보다 의미 있는 일에 매진하라고 타일렀다. “삶의 지혜와 우주의 비밀에 귀의하거나 공동체에 봉사하기 위한 방편”을 생각하거나 “과학과 종교 또는 시민운동”에 혼을 바치는 게 좋을 거라고 덧붙였다. 젊은이들이 모조리 시인을 꿈꾸는 사회가 되면 안 된다고도 했다. 장정일의 말처럼, 시집은 ‘알 듯 말 듯한’ 책이다. 이해하지 못한 시가 수두룩한 채로 책을 덮었는데도 무언가 알게 되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기만의 책. 가벼운 마음으로 군것질하듯 한두 편의 시에 기뻐했을 뿐인데도 시인의 세계를 한껏 거닐었다고 느끼게 하는 행복의 책.

나는 그의 통찰에 희열을 느끼는 동시에 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고민했다. 장정일의 말처럼, 정말 시 읽기는 불필요하며 시는 세 부류의 사람만 읽으면 되는 정도의 예술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장정일은 ‘모든’ 시인을 지양하자는 게 아니라 특정 시인을 거부한 게 아닐까. 릴케나 김수영과 같은 위대한 시인들의 이름이 허명이 아니라면, 위대한 시와 그렇지 않은 시의 차이를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내 친구 S가 떠오른다. 명문대를 나온 영민하고 낭만적인 친구지만, 지적으로는 게으르다.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다. 낭만과 직관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S는 위대한 시와 시시한 시의 차이를 구분하려 들지 않는다. 비범함을 구분하거나 책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보다는 자신에게 꽂혀 들어온 한 줄의 문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쪽이다. 어차피 시집은 ‘알 듯 말 듯 한’ 책이니 구분이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하다는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S의 독서는 어떠한 대상을 포착하기보다 자신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풍경에 집중하는 책 읽기로 보였다. S는 종종 시를 읽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개는 읽다가 말았다. 자신의 마음에 들어오는 시를 만나는 것으로 만족해했다.

직관적인 언어로 글을 쓰는 S에겐 상징적인 언어로 쓰인 시가 궁합에 맞는지도 모르겠다. 딱딱한 이론서와는 달리, 시집 읽기에는 해석의 자유와 창의가 상당 부분 허용되니까. 이 자유가 시 읽기의 행복이자 묘미일 것이다. 독자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해도, 모든 시집을 획일화된 시선으로 읽는 자유는 미덕이 아니다. 그것은 지나친 자의식이고, 부주의하거나 무신경한 시선이고, 때로는 폭력적인 해석이다. 장정일의 말마따나, S에게는 “좋은 시를 읽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시집을 골라야 한다”는 조언은 무의미하다. 무의미한 순환 논리일 뿐이다.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어떤 시집을 읽든, 읽고 싶은 시만 취해도 괜찮다. 그것은 모든 독자의 자유다. 이 글에서 들여다보려는 바는 ‘시를 읽는 나의 태도나 수준이 어떠한가’ 하는 문제다. 그리고 ‘태도를 점검해야 할 만큼, 시 읽기의 효용이 있는가?’ 하는 물음도 절실하다. 밥벌이도 해야 하고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자꾸 시집에 마음을 빼앗기고 종종 시를 쓰고 싶다는 욕망도 찾아들어서 하는 말이다. 대체 시가 무엇이길래?! 시인은 어떤 존재이기에?

“스님이 그냥 스님이듯 시인은 그냥 시인이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굳이 존경할 필요도 없고 귀하게 여길 필요도 없다.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시나 모국어의 순교자가 아니라, 단지 인생을 잘못 산 인간들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인간들 가운데 몇몇은 은근히 뻐기기도 하고 손을 벌려 국고를 구걸하기도 한다.”

장정일의 시인론이다. 시를 읽기가 힘겨웠던 이유가 독자들의 부족함만은 아니었다. 뻔뻔한 시인, 형편없는 시가 있다는 말인가? 물론이다. 장정일은 또 다른 글에서 우리나라에 난립하고 있는 시인들의 협회와 문단을 비판했다. 재정 확보를 위해 등단 조건으로 가입비를 받고, 당선작을 자주 선정하는 등의 파행적인 운영을 그가 모를 리가 없다. 인구 대비 시인이 이리 많은 나라가 또 있을까, 하는 한탄도 했다. 자식이 부모를 닮듯, 시는 시인을 닮는다. 삶과 시에 매진하지 않는 시인들은 시시한 시를 쓴다. 양심이 없으면 전력을 기울이지 않은 시들을 모아 출간할 테고, 양심이 있더라도 돈이 궁하면 현실과 타협하면서 시를 발표한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실상을 구구절절 적어본 것은 시의 세계에 들어선 군상들의 스펙트럼을 그려보기 위함이다. 인생살이에 무능한 감각적인 낭만주의자도 시를 쓰고, 퇴계처럼 사상가의 반열에 선 이들도 시를 쓴다. 빼어난 시와 허술한 시를 양극단으로 하는 시의 스펙트럼은 무척이나 드넓을 것이다. 시에 자신의 전부를 건 시인이 있는가 하면, 돈을 내고 문예지에 시를 올린 시인도 있을 테니까.

장정일의 지적에 무릎을 친다고 해서, 모든 시집을 외면할 필요는 없다. 장정일은 퇴계의 반대편 극단에 선 시인을 두고 한 말일 테니까. 나는 지금까지 읽어 온 시인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다. 퇴계 선생이 시인론에 대해 글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성복 시인은 평생에 걸쳐 시를 써 왔고 근래에는 시론도 썼다. 그는 진실을 좇는 시인이었다. “나는 진실이 너무 좋아요. 진실을 꼭 껴안고 잤으면 좋겠어요. 거짓 위안 속에 편안히 살기보다 진실 속에 불편하게 샆고 싶다는 거죠.” 시인은 고령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엄마, 나 착하지?”라고 물었다. 어머니는 잘라 말했다. “네가 뭐가 착해? 넌 안 착해.” 인터뷰어가 이성복에게 물었다. 섭섭하시진 않았어요? 시인은 덤덤하고 편안한 투로 대답했다. “아니요, 그게 진실이니까.”

상주 태생의 이 걸출한 시인은 지극한 경지까지 나아간 예술가다. “감각에 천재성의 기미가 있더라도, 시에 미치고 삶에 미치는 공부 없이는” 좋은 시가 나올 수 없음을 그에게서 배웠다. ‘시인들의 시인’이라 불리는 그는 김수영을 숭앙한다. “김수영은 ‘시미아’야. 시에 미친 아저씨. (웃음) 당시에 블랑쇼, 릴케, 하이데거를 읽고 정신의 핵심을 꿰뚫었어요. 김수영 시대에 살았던 시인들이 이념과 도덕에 꺾여 빛이 바래도 김수영은 푸릇푸릇해.” 이성복의 시 사랑은 유년 시절부터 남달랐다. “나도 문제적 인간이야. 초등학교 5학년 때 단식 투쟁을 해서 상주에서 서울로 왔거든. 야심가였지. 나는 김수영의 가족묘에 들어가고 싶어요.”

김수영의 시를 음미하고 싶은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경지에 이른 시를 맛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장정일의 처방은 이렇다. “좋은 시를 읽어 내려면 먼저 좋은 산문을 읽어야 한다. 여가의 독서로는 독파할 수 없을 정도의 진득한 산문 정신과의 대면과 그것을 독해하는 훈련만이 김수영 시집과 『친구가 떡볶이 하러 갔을 때』의 진정한 차이를 가늠하게 한다.” (『친구가 떡볶이』는 김수영과 대비되는 가상의 시집으로 보인다.) 왜 산문의 정신일까? 시에 깃든 정신은 명쾌한 이론이나 사실적인 설명이 아닌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되어 있기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상대적으로 산문은 직접적인 언어로 서술된다. 장정일은, 산문을 통해 훌륭한 시를 음미할 수 있는 정신의 함양을 역설한 것이다.

장정일이 소설의 정신을 추천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소설도 시와 크게 다르지는 않으니까. 술술 읽히는 실용서만 읽던 한 지인이 “도무지 소설이 안 읽혀요”라고 물어온 적이 있다. 그의 얘기를 두어 차례 거듭하여 듣고 나니,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소설은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메시지로 설명하지 않고 이야기로 전하죠. 지혜나 진실은 이야기로만 비로소 전해지니까요. 그래서인지 저는 소설 읽기를 생각하면, 우물과 두레박이 이미지로 떠오릅니다. 소설의 세계는 샘이 깊은 우물이고 독자는 저마다 다른 크기의 두레박을 들고 오죠. 우물 안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물이 많지만, 독자들은 자기가 들고 온 두레박만큼의 물만 퍼가요. 주제의식이 뛰어난 소설이라면 그 주제를 고민해 온 경험이 있어야, 시대정신을 포착한 소설이라면 당대 시대상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소설의 정신을 만날 겁니다. 소설에 들이는 시간이 비해 독서의 희열이나 결실이 적다면 방향을 바꾸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좋은 논픽션을 읽는 거죠.”

시나 소설에서 인간 정신의 최고봉을 만나려면, 우물 안의 물을 길어 올릴 정신의 두레박이 필요한 것이다. 걸출한 시인은 비범한 사상가다. 나는 그리 믿는다. 서정시라고 해도 다 같은 서정시가 아닌 것이다. 개인의 졸렬한 감상으로 지은 시가 있는가 하면, 시대의 아픔과 기쁨으로 쓰인 시도 존재한다. 인생의 작가로 김수영을 꼽는, 이성복은 이렇게 말했다.

“김수영의 천재성은 시대정신이에요. 본격적으로 정신과 문학을 일치시키려고 했던 사람이야. 내가 내 인생의 작가를 선택할 때, 그건 배우자를 고르듯 내 인생 전체를 거는 거예요. 김수영은 믿을 만한 사람이었어요. 추악한 이야기도 그 사람에 입에 들어가면 고귀해졌거든. 신랄한 구석도 있었지. 그런데 타자를 공격할 땐 자기가 먼저 홀딱 벗고 제물로 나왔어요. 무시무시하게 공부했지.”

마지막 문장은 공부가 왜 중요한지 깨닫게 한다. 감수성만으로 이해하기 힘든 시들이 있다. 시대정신을 포착한 시나 인간의 본성을 고찰한 시가 그렇다. 고민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곁을 쉬이 내주지 않는 시들이다. 가슴으로 만나야 하는 시가 아니라 머리로 공부하면서 읽어야 하는 시인 것이다. 글을 맺기 전에, 이 글의 주제로 이끄는 질문을 던져야겠다. 시를 읽으려는 독자에게 왜 공부가 필요할까? 시인들이 먼저 무시무시하게 공부하면서 시를 썼기 때문이다. 시를 쓰기에 앞서, 시대를 관찰하면서 세상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치열한 공부 없이 존재의 가치와 세상의 진실을 포착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장정일은 위대한 시가 어떻게 쓰이고, 어떻게 읽혀야 하는지 꿰차고 있었으리라. 시를 읽지 말라는 그의 조언은 시 창작을 둘러싼 매커니즘의 이해에서 나왔을 것이다.

모두가 시를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삶을 견뎌낼 정신의 고양이 중요하지, 시 읽기가 누구나의 지향이나 숙제는 아니다. 시를 외면하고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어떤 영화, 누군가의 삶, 한 권의 산문집에도 높은 경지의 정신이 존재하니까. 나는 장정일이 언급한 독자 군에 속하진 않지만, 앞으로도 종종 위대한 시를 찾아서 공부하듯이 음미할 것이다. 시를 읽으면 인생을 잘 살고 싶어진다. 어떤 시를 만나면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한다. 위대한 시인이 적지 않다. 우물물을 길어 올릴 두레박을 준비했는가? 이 물음을 가슴에 품는다. 시의 우물은 깊은데, 나의 두레박은 작다. 그러니 빼어난 산문집도 탐독할 생각이다. 한 단계 나아질 삶의 진보를 꿈꾸고, 시의 드높은 정신을 만나기 위하여!

“저마다 다른 높이의, 크고 작은 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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