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상상한 멋진 일이 현실이 되려면 조력자가 필요하다. 조력자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거나, 적어도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의지를 꺾지 않을 사람이어야 한다.
– 작가의 다른 글 <그 중에 그대를 만나>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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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시대
국내에서 ‘조직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훨씬 더 이전부터, 이미 글로벌 기업들은 그 필요를 인지하고 해당 분야 개발에 많은 공을 들였다. 당시 다니던 외국계 회사는 그룹에서 지향하는 조직문화 철학을 글로벌 네트워크에 분명히 전하며, 각 지사별로 해당 국가의 풍습과 인식, 사정에 따라 유연하게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해 그 사례를 공유하는 등 횡적 얼라인(align)의 노력을 이어갔다.
한국 지사에서는 당시 리더가 그 분야에 관심과 의욕이 많았다. 그는 늘 편하고 유연한 소통을 통해 창의적이고 세련된 업무 결과가 가능하다고 믿었고, 생산성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직급별 권위의식을 없애고자 수평적 조직문화를 다소 이른 시기에 도입했다. 직함을 없애며 모두를 ‘파트너’라는 호칭으로 통일해 부르도록 했고, 직급별 자리배치를 없애고 자율좌석제를 시행하는 등 ‘가장 일하기 좋은 회사‘의 토대를 마련했다. 리더는 또 회사의 한 층에 용도에 따라 무한의 형태로 변화가 가능한 소통 공간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 공간을 ‘유니버스(Universe)’라 불렀다), 외부에서 많은 경험과 통찰이 있는 최고 문화 전문가(이후 ‘담당자‘로 통칭)를 영입하는 등 그 일에 적극적인 지지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기억 자산
시간이 엮는 인연이란 게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우연한 때에 함께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그 모든 놀라운 경험은 마치, 어쩌다 제작에 참여한 흥행을 예측할 수 없는 실험적인 영화가 대박을 터뜨린 것과 비슷한 성취 같았다. 사실 이 일은 그들과 함께 추억할 수 있는 수많은 값진 경험들의 일부이면서도 그 모든 것들의 시작이었다. 소중한 기억 자산으로써, 아직도 그때의 기억과 기록들이 꽤 유용하다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그리고 깨닫곤 한다. 이상한 상상도 기꺼이 수용하고 공감하는 상대와 함께가 아니라면 그런 멋진 조직문화 경험은 다시 재현하기 어렵다는 것을.
평창 올림픽
“The 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has the honor of the announcing that the 23rd Olympic Winter Games in 2018 are awarded to the city of ‘PyeongChang.’ ”
(국제올림픽위원회는 2018년에 열리는 제23회 동계 올림픽 개최지로 ‘평창‘을 발표해서 영광입니다.)
– 자크 로게 제123차 IOC총회 –
2018년엔 국가적 이벤트가 있었다. 올림픽 역사상 아시아에서 세 번째, 우리나라에선 최초로 동계올림픽이 강원도 평창에서 개최된 것이다. 88년 이후 처음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은 그 의미가 남달라 관심이 높았다. 하지만 현장에서 직접 관람하는 최대한의 감동은 주 5일을(때로는 주말도) 일해야 하는 대부분의 직장인들에게는 사치와도 같은 바람이었다. 모두에겐 본업과 개인의 일상이 있고, 인기 있는 종목의 티켓은 별로 없었다. 직장인에게 서울에서 강원도 평창까지의 심리적 거리는 그 물리적 거리보다 조금 더 멀게 느껴진다는 점을, 연초 큰 문화 이벤트를 기획해야 하는 조직문화 담당자는 유심히 보고 있었다.
차별화
회사에서는 연초에 사내 이벤트를 열고자 했다. 내외부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으며 맞이한 새해에 내부 직원들의 이해와 결속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내 소통 기조를 대표하는 ‘우리가 서로를 모르면 누가 알까?’라는 표어도 하나의 동기가 됐다. 그러므로 담당자에겐, ‘새 해를 맞아 직원들의 소통과 결속, 상호인식에 도움이 되는 이벤트 개최’라는 미션이 주어진 것이다. 쉬운 기획이라면 레크리에이션을 포함한 일반적 형태의 타운홀 미팅이겠지만, 이번에 만들 이벤트는 최대한 많은 직원이 모여 즐길 수 있어야 했다. 일반적 기획에 특별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으므로, 이왕이면 재미와 의미를 담은 남다른 수준의 기획이 필요한 담당자의 고심은 깊어갔다. ‘차별화’는, 이런 일을 하는 이들의 영원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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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 지옥
어떤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은 대체로 ‘불현듯‘ 떠오른다. 그걸 바로 메모하지 않으면 금세 사라지는 경우도 많다. 메모보다 더 확실한 기억의 방법은 누군가와의 ‘공유‘이다. 운이 좋다면, 그로부터 더 발전된, 더 확실한, 더 큰 형태로 그려진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담당자의 아이디어 접근 방식은 그래서, 늘 그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공감으로부터 발전시키는 것이라 했다.
평소 회사의 조직문화를 총괄하며 재미와 의미를 고루 갖춘 문화활동들을 위해 많은 고민을 이어가던 담당자는 이벤트 기획 이전부터 ‘평창‘이란 키워드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처음엔 올림픽이란 빅 이슈가 사내 이벤트 주목을 방해할까 우려하기도 했다.
“직원들이 좀 재미있게 참여할만한 이벤트 뭐 없을까? 안 그래도 그때 평창 올림픽 기간이긴 한데…”
담당자는 ‘국가적 관심이 지대한 동계올림픽‘이란 주제와, ‘우리 주위 동료들 중 상당수는 올림픽을 실제 현장에서 즐기지 못한다‘는 패인 포인트(pain point)를 연결 지어 기회로 삼고자 했다. 행사에서 럭키 드로우(lucky draw)로 올림픽 티켓을 선물한다는 일반적이고 비용 효율적인 방법 대신, ‘우리가 회사에 올림픽을 개최하자!’라는 이상한 상상을 대화 속으로 끌어들인 것은, 우연이었을까?
처음엔 농담이라고 생각하며 그 대화에 기꺼이 즐겁게 동참했다. ‘동계올림픽 종목을 실내에서 구현한다고? 창문을 모두 열고 물을 뿌려 바닥을 빙상으로 만들지 않는 한 그게 가능할까?’ 싶었다.
“바닥에 스키 바인딩 설치하고 최대한 몸을 숙여 그 각도를 재는 거죠. 자세에 점수를 주고,..”
“수레에 타고 누가 그걸 밀어서 루지를 구현하면 어때?”
쓸데 없이 몰입한 대화는 우리를 지옥에 빠진 개미로 만들었다.

몰입
그날의 대화 이후 담당자는 머리를 다친 사람처럼, 샤워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늘 그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담당자는 ‘어떻게‘에 대한 답 이전에 ‘왜‘에 대한 답도 구해야 했다. 직원 중 일부만 즐거운 홍보성 이벤트는 이번 기획의 목표가 아니었다. 아직 개막 전인 2018 평창올림픽 대회 준비 현장까지 다녀올 정도로 열정적으로 몰입한 결과, 담당자는 비로소 확실한 윤곽을 그릴 수 있었다. 윤곽이 그려지자 색을 함께 채울 조력자가 필요했다. 회사 내부에서 TF를 모집했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직원 포함 여섯 명의 TF 구성원이 수 차례 회의하며 함께 아이디어를 나누고 행사의 홍보와 진행을 분업했다.
종목
이런저런 다양한 아이디어를 모으고 정리해 최종적으로 스키점프, 컬링, 피겨스케이팅, 하키, 크로스컨트리, 루지 총 여섯 종목이 채택되었다. 이걸 어찌 사무실 안에서 구현하느냐 하는 고민의 결과는 이렇다.
①두 발을 묶고 뛰다가 엎드려 세 발, 서서 세 발 과녁으로 장난감 총을 쏴 시간과 정확도로 점수를 산정하는 크로스컨트리, ②바퀴 달린 의자 위에 앉은 동료가 컬링 스톤이 되고, 회사 사무실 복도 매끈한 대리석 바닥을 빙상으로 구현해 동료를 밀어 점수를 얻는 컬링, ③회전의자에 동료를 앉히고 팀원이 총 10바퀴 회전(더블액셀)시키고, 최대한 웃긴 표정으로 셀카를 찍은 후, 다시 10바퀴 회전(트리플 액셀)하고 타깃을 향해 총을 쏘는 피겨스케이팅, ④실내 고정된 볼과 풋살용 네트, 하키 막대기로 난이도에 따라 다른 점수가 매겨진 좁은 타깃 구멍에 집어넣어 점수를 획득하는 아이스하키, ⑤바퀴 달린 트롤 리위에 동료를 눕히고 끌어 사무실을 한 바퀴 돌아 골인지점에 도달하는 시간을 재는 루지, 그리고 ⑥뒤에서 동료의 팔을 잡아 지지하고 버티며 최대한 반듯한 자세로 바닥에 가깝게 누워 남는 각도를 재 점수로 환산하고 제자리멀리뛰기를 해 거리점수를 더하는 스키점프 등, 그냥 설명으론 쉽게 상상이 되지 않을 것이므로, 따로 매뉴얼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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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이미지 – 임수진 파트너 (평창처럼 SAP TF멤버 겸 홍보대사)
이 이야기는 2편 <상상한 멋진 일이 현실이 되려면 2 : 실현 >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