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행위 – 생각의 산파, 그 너머에 있는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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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스승이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최소한의 짐을 챙겨 길을 나섰다. 뮌헨을 떠나 스승이 입원한 파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22일 만에 파리에 도착한 남자는 무사히 스승을 만났다. 무모한 행동치고는 다행스러운 결말이었다. 남자의 이름은 베르너 헤어초크! 괴짜로 알려진 독일의 예술 영화 거장이다.

 

과연 괴짜다. 위독하다는데, 왜 걸어갔을까? 반갑게도 기록을 남겨주었다.

“1974년 11월 말, 파리에 있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로테 아이스너가 병세가 위중하여 곧 죽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럴 수 없다, 지금은 안 된다, 이 시점에 독일 영화계가 그녀를 잃을 수는 없으며 우리는 그 죽음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라고 나는 말했다. 재킷과 나침반, 그 외의 필요한 물품을 더플백에 챙겼다. 장화는 새것이고 튼튼해서 충분히 믿을 만했다. 걸어서 가면 그녀가 살아 있을 거라는 확신을 품고 나는 파리로 향하는 최단 거리의 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전히 혼자이기를 원했다.” – 베르너 헤어초크, 『얼음 속을 걷다』의 서문 중
말하자면 걷기는 간절한 자기 암시였다. 스승의 생존을 비는 기도였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나는 이 숭고한 감정에 고개 숙인 존경을 보낸다. 동시에 그의 의도가 삐딱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의 선택은 독단의 발로가 아닐까? 혹은 철없는 자기기만이거나? (『얼음 속을 걷다』는 22일간의 도보 에피소드로부터 4년이 지난 후에 쓴 글이다.) 예단은 금물이다. 나야말로 경지에 오른 정신세계를 독단적으로 해석할지도 모르니까.
지금의 내 수준에선 이해하지 못할 어떤 위대한 예술가의 정신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중이다. 그의 결단과 걸음에서 느낀 숭고함이 한 독서 기억을 불러냈다. 곰팡이 핀 사과를 버리려다가 그대로 두었다는 이우환 선생의 일화다. 두 달여 여행을 다녀왔더니 방에서 썩은 사과가 달짝새콤한 냄새를 풍기더라는 것이다. 가족도 함부로 선생의 방을 드나들 수가 없었다는 말에서 전후 사정이 이해되었다. 정작 이해할 듯 말 듯한 얘기는 다음에 이어졌다.
“나는 서둘러 창문을 열고 공기를 바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썩은 사과를 버리려고 쓰레기통을 찾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마음이 변했다. 색깔 하며 모양 하며 그리고 냄새 하며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정물······. 평범한 감상용 과일에 비해 그야말로 진기한 오브제. 나와 자연과 시간이 함께 만들어낸 귀중한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을까. 곰팡이 핀 접시를 책상에서 사방탁자 위에다 옮겨놓자 한층 의미 있는 듯하고 아까운 생각이 들어 조용히 창을 닫고 커튼을 친다.” <곰팡이 핀 사과>, 『시간의 여울』에 수록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말로 표현하긴 힘들다. 곰팡이 핀 사과를 버리지 않은 이유보다 이우환 선생의 위작 문제를 설명하는 쪽이 쉬워 보였다. 이성적인 설명이 힘들 뿐, 헤어초크도 이우환 선생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난생처음로 곰팡이에게서 신성한 기운을 느낀 것이다. 요즘엔 걷기에서도 영험한 기운을 느끼는 중이다. 이런 생각을 하던 터에 『두 발의 고독』이라는 책에서 걷기에 대한 헤어초크의 신념을 만났다. 우연한 행운이었다.
“세상은 걸어서 여행할 때 황홀한 열린 공간이 된다.” – 베르너 헤어초크
예사로이 넘길 수가 없는 문장이었다. 아니, 읽자마자 마음에 콕 박혔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저자가 독일의 괴짜 감독을 불러낸 이유는 걷는 ‘속도’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천천히 걷는 사람은 많은 것을 보지만, 빨리 걷는 사람은 주변을 잘 보지 못한다. 최대한 빨리 달리는 사람은 자기 몸에 관심을 집중한다. 느리게 걷는 사람은 자기와 멀리 떨어진 사물들, 세상과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을 향해 주목한다.”(p.240)
누구나 경험할 법한 얘기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속도의 중요성을 배웠던 터전은 양평 자전거길이었다. 자동차로 숱하게 오갔던 길인데, 자전거를 타고 갔더니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바뀌었다. 숲이 있었고 강이 흘렀다. 이전에도 보긴 했지만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순식간에 스쳐 갔던 풍광들이 바람으로 소리로 얼굴에 새겨졌다. 한번은 자전거 대신 두 발로 걸었더니 또 다른 세상을 만났다.
걸을 때마다 자연의 표정이 달랐다. 시절에 따라 향이 바뀌었고, 산새들의 지저귐이 가득했다. 계절마다 고유한 꽃이 피어났다. 걸어야 비로소 만나는 존재들이었다. 과연, 걸으면서 만나는 공간은 달랐다. 길마다 서로 다른 풍광을 경험했다. 살과 오감으로 생생하게! 때론 더웠고 때론 시원했다. 마음의 표정은 달랐지만 대부분 행복했다. 때론 경쾌하게, 때로는 고용하게! 이 모든 경험을 아우르면 ‘황홀’에 이르는 거겠지.
공교롭게도 뒤이어 읽은 책에서도 속도 얘기가 등장했다. 도시학자 리처드 세넷 또한 자신의 저서에서 인간의 이동 속도에 주목했다. “빠른 이동 속도는 자신과 타인의 살(flesh)에 대한 감각을 둔화시키고, 세상을 최면 상태로 경험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이동하는 일에만 함몰되어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향유할 줄 모르는 “운전자는 공간을 뚫고 지나가고 싶어할 뿐 공간에서 자극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세넷의 문장을 읽다가 섬뜩해졌다. ‘최면 상태에서의 경험’이 무엇을 뜻하는지 감이 왔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온갖 생각을 하느라 ‘어떻게 여기까지 운전해서 왔지’ 하고 놀랐던 적은 나만의 경험이 아니리라. 이것은 이중의 섬뜩함이다. 사고가 날지도 모를 가능성으로 인한 섬뜩함 그리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무신경에서 오는 섬뜩함! 어떤 길은 정말 기억나는 게 없다. 놀랍다, 분명 내 육체와 자동차가 지나온 길인데···.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경험이라니! 이것을 ‘백지 경험’이라 부르면 어떨까. 총천연색 세상인데도 인식하지 못했고 그리하여 머릿속에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았다. 백지처럼 말이다. 소음의 분류를 염두에 둔 명명이다. 소음이 특정 음높이를 유지하는 ‘컬러 소음’과 넓은 음폭을 갖는 ‘백색 소음’으로 나뉘더라. 백색 소음이 일상생활에 방해되지 않듯이 백지 경험도 먹고 사는 일에는 누가 되지 않는다. 몰입과 같은 유익한 백지 경험도 있고.
문제는 속도의 과잉으로 인한 백지 경험이다. 삶의 질, 사람과의 관계, 세상을 이해하는 일에 은근히 악영향을 미칠 테니까 하는 말이다. 지난주의 일이다. 어느 목가구 전시장에서 ‘공간’의 가치를 깨우쳤다. 가구와 가구 사이에 자리한 ‘넓은 빈 공간’ 덕분에 예술과 사람 그리고 내면의 사색을 만났던 것이다. 그 공간을 향유했던 배경에는 ‘속도’의 영향도 컸다. 그날 90분을 머물렀는데, 그 빠르지 않은 속도의 공도 있었을 것이다. 5분 만에 빠져나왔다면 그날의 경험도 함께 증발했을 테니. 이른바, 백지 경험!
속도가 힘이요, 관건이다. 총을 보시라. 작은 쇠붙이에 강력한 속도를 덧입히면 살상 무기가 된다. 하산할 때 다리에 힘을 주면서 조심하거나 뛰어 내려오지 않는 까닭은 속도의 위력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어딘가로 여행할 때 여유로운 국도 대신 고속도로를 쌩쌩 달리는 걸까? 속도에 대한 무사유는 아닌지?! 빠른 속도의 위해성과 느린 속도의 가치를 깨치기 시작한다면 크고 작은 삶의 변화가 일어날 것만 같다.
내가 지금 속도의 저력을 지나치게 과신하는 걸까? 아니면 인간의 ‘느린’ 이동, 즉 걷기야말로 영험한 행위인데, 우리가 잘 모르고 사는 걸까?
어쩌면 우린 소요학파들의 생각에 갇힌지도 모른다. 그동안 걷기가 생각의 산파라고 생각해 왔는데, 걷기가 서운함을 느낄 법해서 하는 말이다. 생각의 산파 그 이상이다. 걷기는 곰팡이 핀 사과처럼 외면하기 힘든 삶의 요소다. 창조적 생각의 요람이자 불안과 무기력의 무덤이다. 자신과 세상을 위한 기도요, 공간을 총천연색으로 만나는 경험이다. 중요한 것은 이동하는 속도다. 마음의 속도와 걷는 속도가 산책을 산책답게 만든다.
어찌됐든 무모해 보였던 괴짜의 바람은 이뤄졌으니,
친구이자 제자를 만난 스승은 9년을 더 살았다.
*
<인용한 책들>
– 베르너 헤어초크, 안상원 옮김, 『얼음 속을 걷다』, 밤의책, 2021
– 토르비에른 에켈룬, 김병순 옮김, 『두 발의 고독』, 싱긋, 2021
– 리처드 세넷, 임동근 옮김, 『살과 돌』, 문학동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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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eien75
멤버
dkeien75
2 년 전

좋은 글 감사합니다. 본문이 뇌신경학 측면에서도 상당히 이해되는 내용입니다. 책을 추천해주신거 같아 구매해서 정독하겠습니다.

dkeien75님이 2 년 전 에 수정한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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