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지적 호기심이 강렬하다. 언제나 책을 읽는가 하면, 수많은 강연을 찾아다닌다. 인터넷을 통해서도 많은 텍스트를 읽어 들인다. 나이가 들면 현실과 타협하며 안주하기가 십상인데, 40대 중후반의 나이에도 K의 지적 열정은 여전히 펄떡인다. 호기심이 왕성한 이들은 독서 계획이나 공부 목적을 세우지 않고서도 거침없이 읽어간다. K도 마찬가지다.
강렬한 지적 욕망에 걸맞게 날로 지성이 깊어지면 좋으련만, 끊임없는 지식 습득에 비하면 K의 지적 성장은 더디게 보였다. 무엇 때문일까? 하나의 원인은 책을 선택하는 안목과 계획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았다. K의 지적 생활을 들어보니, 중요한 지식이 사소한 지식에 파묻히거나 우선순위가 높은 책들이 엉뚱한 책에 밀려나곤 했다.
마치 눈먼 골동품 수집가처럼 보였다. 시간과 품을 들여 이런저런 물건을 사들였지만, 가치 있는 물건을 모으지는 못하는 수집가 말이다. 그 역시 책을 선택하는 안목과 우선순위가 없어 보였다. 욕망은 강렬한 에너지다. 어떻게 해야 그 에너지를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말을 달려 목적지를 향하듯 욕망을 부려서 지성으로 달려나가야 한다.
욕망이 목적을 앞당기기도 하지만, 욕망이 목적을 방해하기도 한다. 욕망은 어떻게 목적을 방해할까? 목적 없는 욕망에 이끌리는 독서의 경우를 보자. 욕망은 어떻게 독서를 방해할까? 앞선 질문을 이같이 바꾸어 읽어도 좋으리라.
니체 사상의 이해를 목적으로 니체 읽기를 계획했다고 하자. A는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부터 집어 들었다. 여동생과의 근친성애, 바그너와 루 살로메의 관계, 니체가 매독에 걸린 사연 등 진솔한 고백이 담긴 책이다. 호기심을 끄는 텍스트지만, 니체 이해에 필수적인 책은 아니다. 독일어 원고가 없고 시간적 오류가 많다는 이유로 이 책을 위작으로 보는 연구자도 존재한다. 욕망이 가더라도 목적에 맞지 않는 독서인 것이다.
B는 니체의 메모를 담은 유고집부터 살핀다. 니체의 저술 이해에 도움을 주는 정보가 많지만,
유고집이 니체 읽기에서 최우선 순위는 아니다. C는 니체가 쓴 아무 책이나 집어 들고 한 문장, 한 문장을 세심하고 꼼꼼하게 읽기로 했다. 길을 잃고 헤매기 쉽다. 우직한 뚝심도 복잡한 미로에서는 갈팡질팡하기 마련이다. D는 니체 전작주의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한 사상가를 오롯이 이해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드는지 숙고하지 않은 채로.
네 가지 접근 방식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니체에게 효과적으로 다가서지 못했다. 사생활이나 내밀한 이야기를 알려는 관음증적인 지식 욕망이나 필요성을 묻지 않고 관련 텍스트라면 무조건 살펴야 한다는 문헌학적 결벽증은 창조적인 지적 생활을 방해한다. 무엇이 중요한지 잊은 채로 지금 하는 일에 빠져드는 황홀경이나 큰 그림을 놓치고 세부사항에 파고드는 현미경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전작 읽기는 무분별한 욕심의 발로이거나 이상주의적인 무지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전작 읽기는 신중해야 한다. 니체와 같은 대사상사의 경우는 예외지만, 통찰력 대신 수집벽만 강한 편집인이 어떤 작가의 전집을 간행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작 읽기에 들이는 엄청난 시간의 가치를 숙고해야 한다. 전작 읽기보다는 훌륭한 편집인의 선집을 읽으면서 좋은 해설서를 참고하는 게 나은 경우도 많다.
목적을 달성하는 효과적인 독서 생활을 위해서는 아무 책이나 집지 말아야 한다. 아무 책이나 파고들기 전에 자문하면서 생각해야 한다. 왜 다른 작가가 아니라 니체인가? 니체에 대해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왜 다른 책이 아니라 이 책인가? 니체가 중요하게 읽히기를 바랐던 자신의 책은 무엇인가? 니체 연구자들이 추천하는 책은 무엇인가? 이 책은 무엇을 다루는가,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나의 독서 목적과 이 책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지적 욕망이 강렬하거나 다방면에 강한 호기심을 지닌 이들이 지적 성장을 이루려면, 무분별하게 뻗어가는 욕망을 제어해야 한다. 목적 앞에 욕망을 무릎 꿇려야 한다. 욕망을 줄이라는 말이 아니다. 지적 욕망은 책을 들게 하니까. 욕망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이후로는 목적에 전념해야 한다. 욕망은 하나의 목적이 달성된 후 다시 달려가고 싶을 때 꺼내 들면 된다. 지적인 욕망이 구슬 하나하나를 만든다면, 공부의 목적은 구슬을 꿰어 보배를 만든다.
욕망은 강력하다. 목적을 세워야 조금씩이나마 제어가 가능해질 것이다.
스스로 묻자. 이 책을 왜 읽는가? 무엇을 위한 독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