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무이탈체포조를 소재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 D.P.(Deserter Pursuit)의 인기가 높다길래, 좀 처럼 할일도 없고 정주행을 해 보았습니다. 첫편을 보다가 중간에 너무 힘들어서 멈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 해 전의 그 상황 속 나는 피해자였나? 가해자는 아니었나? 방관자이긴 했던 것 같다는 생각들이 심난하게 뒤섞였기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의 인기가 치솟자, 육체적 정신적 피해를 주장하고 나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국방부에서는 ‘요즘 군대는 그렇지 않다’는 군색한 답변을 내놓기에 이르렀다죠. 이 드라마의 이야기가 사실에 가까운 핍진성(Authenticity)을 가지고 있다면, 여전히 군대에서의 육체적 언어적 폭력은 현재성을 가지는 것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아마 새로운 버전의 위압이나 집단적 괴롭힘 같은게 있을 것 같다고 어렴풋이 추측할 따름입니다. 뭐, 요즘 군대는 그렇지 않다고 하니까요.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갈등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탈영하는 병사와 이를 추적하는 병사들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점. 같은 처지 속에서 다만 다른 입장에 ‘한시적’으로 서 있다는 것의 자각에서 오는 혼란스러움 같은 것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고만고만한 나이 또래들의 20대 젊은이들이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쩔 수 없음’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출구가 요원한 시간들. 선임과 후임의 권력관계는 대체 어디에서 근거를 가지는 것이며, ‘군대’라는 제한적 공간에서 벗어난 이후의 관계는 어떻게 정리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물론 선임이 가진 축적된 경험. 흔히들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라는 게 존중받아야 할만한 것이라고 해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위압과 폭력을 휘두룰만한 권위를 부여해줄만큼의 특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선배’라는 단어를 아주 소중한 의미를 지닌 단어로 사용합니다. 거칠게 말하면, ‘개나 소나 선배랍시고 위세떠는 인간’들을 선배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죠.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 한살 더 먹었다는 선배라는 작자들이 후배들에게 훈육한답시고 애니멀트레이닝(이라는 ‘단체기합’의 은어) 같은 일이 자행되었다면 여러분 믿으시겠습니까? 뭐 국방부 말마따나, 요즘 대학은 그렇지 않겠지만요. 그 후로 ‘선배’라는 단어에 알레르기 같은 게 생겼습니다. 직장 선배도 살갑고 좋은 분들도 많았지만, 선배랍시고 으스대며 나이값 못하는 찌질이들이 분명 있었고요. 에세이스트 고종석이 시원하게 일갈한 바 있듯, ‘이게 다 지랄같은 나이 문화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 두살 더 먹었다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후배’라는 관계를 제멋대로 설정하고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선배로서의 품위를 내보이는 분들도 분명 적지 않아서…진심 200% 꾹 눌러 담아서 소중하게 ‘선배’라고 부르는 분들이 아주 소수 있습니다.
선배가 후배보다 위에 있다는 착각.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이가 적은 사람에게 간섭하고 개입할 권리가 있다는 착각. 이런 것들이 아주 어린시절부터 구조적으로 착착 쌓이면서 하나의 견고한 지층을 이루고, 그것이 회사와 사회에까지 파급력을 미치는 현상. 우리 회사는 어떤가요? 직장 내에서의 괴롭힘 유형을 보면 선배가 후배와 후배라는 하나의 계층적 관계설정이 거의 디폴트처럼 되어 있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직급과 연차, 물론 회사라는 조직이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 일정 수준의 계층(Hierarchy)구조를 이루는 게 효율적이기는 하겠지만 앞으로의 세상에도 유효한 개념일지 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벌써부터 조금씩 붕괴되어 가는 현상들이 보이기도 하는데, 하나의 대세로 자리 잡는데는 어느정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희 회사의 경우만 보더라도 ‘님’ 호칭/제도를 도입한지 이제 5년차가 되어가는데, 잘 안착한 팀이 있는가하면 어디에서는 여전히 한국식 부장차장과장님 호칭이 선호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에 관해서는 느리더라도 제도가 행동을 변화시키기까지 꾸준히 추진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저와 비슷한 중간관리자급이거나 윗 세대의 분들이 있다면, ‘그럼 이제 대체 어쩌란 말이지?’라고 의문을 가지는 분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제 윗 세대들이 발휘해야 할 리더십 덕목 중 하나로 저는 정치적 민감성 (Political Sensitivity)을 제안 드리고 싶습니다. 정치에 대한 환멸이 넘쳐나는 사회라서 이 단어를 제대로 받아들이는데 상당한 심리적 저항이 있으시겠지만, 이 단어는 우리 일상의 뉴스에서 다루어지는 정치와는 큰 관련이 없는 단어입니다. 쉽게 정리하자면, ‘상대방을 기분 좋게 만드는 능력. 그로 인해 내가 원하는 것을 더욱 쉽게 달성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사실 상당히 높은 수준의 사회적 민감성 (Social Sensitivity)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과 이후의 세대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체득하는 일부터 시작해야겠죠. 사실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특히나 이후 세대들과 말이죠. 제 경우에도 그렇고요.
그러자니 필요한 것이 ‘겸손함’입니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충고, 조연, 평가, 판단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것만 달성한다고 해도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들리고 보이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특히나, 요즘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이전의 세대가 누리지 못한 디지털 경험과 그에 기반한 통찰이 놀랍게 축적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무엇에 반응하고, 어디에서 동기와 원천을 얻는지 이해하려는 노력부터 시작해야겠죠. 사실 쉽지 않습니다. 이들과 공감의 주제를 마련한다는 것도, 이들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주어야 할지 난감할 때도 많고요. 저는 종종 경험과 감정을 공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물론 주제는 상대방이 정하도록 놓아 두고요. 경험과 감정을 공유하는 일에도 특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어설프게 달려들었다가 ‘라떼는 말이야’ 식의 장광설이 되기 쉬우니까요.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감정의 공유로 출발해서, 경험을 공유해도 좋을지 허락을 구한 후, 그 경험이 가져다 준 결과가 어떤 것 이었는지 ‘담백하게’ 설명하는 일. 반복하지만, 말처럼 쉽지가 않죠. 그래서 다시 정치적 민감성의 기초로 돌아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나아갈 길을 정하는 게 필요합니다. 이게 하나의 프로세스나 사고과정이 아니라, 얽히고 섥히면서 하나의 대화에서 역동(Dynamics)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도록 해야하는 일이라서 어렵습니다.
그나마 쉬운 방법이 있다면, 나의 나이값이 주는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직장 상사와 후배, 선임과 후임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이 다른 인간을 만나는 일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시 D.P. 이야기로 돌아가서, “우리는 나중에 후임들한테 잘해주자”라고 말하던 조석봉 일병이 구조적 폭력의 또 다른 대체자가 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악인들 사이에 악인이 재생산 되기가 쉽습니다. 좋은 사람들 사이에선 좋은 사람이 되지 않기가 어렵고요. 이제 자기검열의 시간입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일들이 일상과 도처에 너무나 많습니다. 그때는 관례로 받아들여지던 일들이 이제는 더 이상 일말의 용납도 허용되지 않는 일로 리포지셔닝 되는 일 말이죠. 그래서 우리의 나이값은 그 값이 0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같아지도록 계속 계산을 반복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이리하여 나이문화가 “바뀔 수 있고, 바뀌고 있고, 바뀌고 있어야 하는” 문화가 되기를, 적어도 회사에서만큼은 되기를 희망 해 봅니다.